주일설교

주일설교
조회 수 2512 댓글 0
1. 제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천국’은 어떠한 나라일까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질문에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장난감과 인형이 많은 나라’, ‘게임을 매일 같이 할 수 있는 나라’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공부가 없는 나라, 연예인을 자유롭게 보고 만날 수 있는 나라, 자유를 만끽 할 수 있는 나라’로 보았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아픔이 없는 나라, 고통이 없는 나라로 이야기 합니다. 아마 이계준 목사님께서는 천국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고, 마음껏 냉면을 먹을 수 있는 나라‘로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죽음 이후의 삶을 천국으로 보지 않고, 이 나라를 하느님 나라로 생각하며 하느님의 의가 이루어지길 소원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서로 처해진 상황과 환경에 따라, 그리고 신앙의 배경에 따라 천국과 하늘나라에 대한 관념도 대부분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흰옷 입은 천사, 빈 무덤, 믿기 어려운 기적, 의심 많은 도마, 실의에 차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 혹은 예수의 임종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그의 무덤을 찾아가서 부활의 첫 증인이 된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 아니면 부활하면 계란이 생각나십니까?
부활에 대해서도 사람의 환경과 신앙에 따라 서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부활을 믿습니까” 라는 질문에 어떤 이는 대답합니다. “그럼요, 당연히 믿지요. 내가 만일 부활을 믿지 않았다면 이시간 예배당에 와서 앉아 있겠어요? 당연히 주님의 부활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대답할 것입니다. “믿긴 믿어야 하겠는데, 솔직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사실 내놓고 의심할 수 없어서 그렇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솔직히 고백합니다. 믿어지지 않습니다”라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믿을 수 없습니다. 부활은 믿는 것은 2000년 전이나 가능했지 어디 오늘날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이다.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2000년전에 지어낸 사기이다에 관심 가지기 보다는 이 부활에 대한 의미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은혜에 대하여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생각도 서로의 신앙과 환경에 따라 생각하는 바가 다를 것입니다.
신학생때에 성지순례를 잠깐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애굽을 거쳐서 이스라엘을 갔을 때, 저는 인상적인 두 곳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는 카이로 근처에 있는 쿠프왕의 피라미드였습니다. 그것은 기원전 2800년-2300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서 30년 동안 만명을 동원해서 2.5톤이나 되는 큰 돌을 230만개나 쌓아 올려 만든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웅대한 모습은 왕의 영생과 부활에 대한 소망의 상징으로 보여졌으나, 무덤 만이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께서 묻혔던 빈 무덤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예루살렘에는 빈 무덤이 두 곳 있는데 어느 곳이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이 두곳의 무덤이 모두 비어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과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이 날에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2. 부활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성탄절과 더불어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를 결정해 주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둘 다 ‘빛’, 생명의 빛으로 상징된다고 봅니다. 성탄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의 탄생이기에 빛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장 5절 말씀에 ‘그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활의 사건도 이와 동일하게 컴컴한 무덤 속 죽음의 어둠을 깨고 환한 생명의 빛을 본 사건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부활의 빛 아래서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빛의 자녀로 살도록 도와줍니다.
먼저 부활은 예수 자신에게 비추인 하느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지극히 모시면서, 그의 뜻을 행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하느님의 나라 운동을 하시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효자 예수님의 억울함을 아버지께서 친히 풀어주신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2장 23-24절 말씀에 보면 베드로 사도는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빛은 예수께서 사신 의로운 삶, 그의 하느님 나라가 임한다는 약속의 말씀, 그의 가르침, 그의 행적, 그의 죽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입증해 준 것입니다.
부활은 둘째로 예수의 제자들에게 비추인 빛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자기 민족을 해방시키고 구원해줄 메시아인줄 알고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스승의 참담한 죽음을 목격하고 실망과 좌절, 허탈감과 배신감 속에서 예수님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 흩어졌던 제자들을 다시 모이게끔 한 것은 이 부활의 빛이 그들에게 비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로 실패한 예수,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자신있게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제자 중의 제자, 그러면서도 여러 모로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비겁했기에 자기가 따라 다니던 스승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잡아 뗄 수밖에 없었던 베드로에게도 부활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로마에서 자기 스승의 길을 좇아 십자가의 처형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메시아라는 황당무계한 말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다니는데 앞장섰던 바울에게도 부활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이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을 위한 제일의 선교사, 세계 기독교의 창시자와 같은 존재로 변화시킨 것 역시 다마스커스로 향하는 길 위에서 그에게 강력하게 비춘 부활의 빛이었습니다. 이 빛에 의해 고꾸라져 눈이 멀었다가 다시 시력을 회복한 사울은 바울로 거듭나서 십자가에 달린 자가 메시아라는 복음의 핵심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부활은 또한 초대교회에 비추인 빛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엄청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승리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부활의 빛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고난과 역경의 삶을 이기고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패배 속에서도 승리를 노래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의 빛 때문입니다. 낮은데로 임하는 십자가와 자기 비하의 삶 속에서도 초대교회에 차고 넘치는 기쁨과 감사, 은혜와 감격이 있었던 것은 부활의 빛이 그들을 감싸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을 의심하는 것은 곧 교회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의 존재 자체가 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실패한 예수,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구세주로 선포하는 이 놀라운 반전은 부활에 대한 확신 없이는 생각할 수 없으며, 도망갔던 제자들이 다시 모여 예수를 전하는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된 사실도 부활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고전 5장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빛은 고난 속에서도, 어려운 삶의 여건 속에서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승리에 차며,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3. 이러한 부활의 빛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비추길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2000년전 초대교회 신자들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의 편안한 삶과 물질적 풍요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울하게, 무겁게, 근심과 염려, 두려움 속에서 어둡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바로 부활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들의 삶을 이토록 우울하게 짓누르고 있는 것입니까? 물론 세상의 온갖 염려와 근심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잘 안되는 사업 걱정, 실직의 두려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 뜻대로 되지 않는 인간관계, 병고와의 싸움, 감당하기 너무 무거운 사회적 책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언제나 속상하게 만드는 한심한 사회, 정치적 병리현상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는 보이지 않는 힘은 두려움일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에 머물러 있는 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감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꾸며 낸 이야기임을 뻔히 알고 있는 공포 영화 한 편에도 두려워합니다. 또 어떤 때는 전혀 무서워 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도 공연한 상상력의 노예가 되어 두려움에 떨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러한 공허한 두려움이 아닌 실제적인 위험과 압박 때문에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저는 젊은 나이이지만 사실 죽음이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두렵습니다.
가끔 악몽을 꾸게 됩니다. 그런데 그 꿈에 갑작스럽게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꿈을 꾸게 됩니다. 꿈에서 일어났을 때 정말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해서 사고를 통해 죽는 일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도블록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다가 차가 갑작스럽게 돌진하여 죽는 사람들, 고속도로에서 큰 트럭의 바퀴가 빠져 반대편에서 오던 승용차에 들이박아 죽게 된 사건들을 볼 때, 저는 때론 두려운 마음이 들게 됩니다. 한치의 앞도 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로 인해, 또한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두려워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 제자들이 바로 이러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결코 예수를 버리지 않겠다던 제자들은 자신들의 그 맹세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서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여인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은밀한 곳에 모여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 보면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로 죽음에 몰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부활의 빛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때 제자들은 만나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자마자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말씀은 적용됩니다. 부활의 빛을 만나기전 우리의 삶은 예외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었고, 세상이 주는 두려움과 미래에의 불안감, 현실에 대한 염려 따위의 노예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 된다는 것은 부활의 빛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얻었을 때 가능했던 일일 것입니다. 오늘 부활의 빛을 통하여 우리 안에 염려와 걱정,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4. 또한 부활의 빛은 우리들에게 그분으로부터 받은 평화를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한 마디로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신 생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평화의 주로 오신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성취한 평화를 확장키 위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평화의 주”로 세상에 파송했듯이 당신의 제자들을 “평화의 사도”로 파송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들도 “평화를 전하는 자, 부활의 빛”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된 우리는 예수께서 주신 평화의 선물을 우리들 가운데 단순히 머물게 할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나누어 주어야만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부활의 빛,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평화의 선물은 우리들이 마땅히 받아 누려야 만 할 특권인 동시에 지체와 이웃을 향하여 발산해야만 할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기 위해서 우리는 평화를 가로막는 담부터 허물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중간에 막힌 분리의 담’을 허물고 평화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즉 평화는 막힌 담을 헐어 버린 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빛을 받은 우리들은 먼저 그 평화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을 스스로 무너 뜨려야만 합니다. 가진자와 없는 자의 담, 배운자와 못배운자의 담, 이곳 출신, 저곳 출신하는 지역적 분리의 담, 정치적인 견해의 담, 세대간의 담들을 허물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 신문기사에 연세대 재활의학과 교수들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 함게 한 마지막 밤에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을 기념하여 이 의사분들이 예배 속에서 직접 환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순서를 재현한 것입니다. 하늘같은 의사 선생님이 엎드려 발을 씻어주자 할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젊은 의사들은 앞으로 좀더 낮은 데로 임하는 의사가 되자고 다시한번 굳게 다짐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먼 옛날의 얘기도 아니고 먾 훗날의 얘기도 아닙니다. 낮은 데로 임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곳 어디서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반복되며, 자기만을 알고 살던 이기적이고 닫혀졌던 사람이 이웃의 아픔에 마음이 열려 남을 섬기는 존재로 변화될 때 예수의 부활은 무수히 반복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변화를 뜻하며,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남을 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완성된 인간 그 자체입니다.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즉 부활의 빛을 만났을 때 우리들의 삶 속에는 미래를 두려움 없이 희망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어둠속에 사는 존재가 아니라 부활의 빛 아래 사는 존재들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온 세상을 덮었던 캄캄한 어둠은 부활의 밝은 빛 아래 사라졌고, 이제 모든 것이 밝아졌습니다. 부활의 빛 아래 우리의 모든 냉소주의, 회의주의, 의심의 안개는 걷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빛을 온 세계에 비추는 평화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도의 군면의 말씀으로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핫되지 않을 것입니다”(고전15:57절)

제목: 부활의 빛
말씀: 요한복음 8: 12절
요한복음 20: 19-21절
양성진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