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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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음 주일에 이 교회에서 22년간의 목회를 마감하면서 오늘 마지막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으로 마무리를 지을까 몇 일간 고민하다가 제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이 늙어서 자기 말을 하게 되면 주로 자랑을 일삼기 때문에 추태를 부리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비록 추태처럼 보여도 이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의 직계 제자가 아니면서도 사도들 중에 가장 탁월한 전도자요 그리스도의 인격에 도달하려고 노력한 인물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로마세계에 전달한 위대한 신학자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시간에 사도 바울의 말씀과 삶에 비추어 저 자신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이것은 제가 바울에 비견할 만한 사람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가 일생을 그리스도를 위해 바친 모범적인 사도로써 나의 훈륭한 스승이 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푝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 3:13-14) 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수많은 교회를 설립하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믿게 하였으며 근 10권에 달하는 성경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과거의 업적에 만족하거나 자랑하지 아니하고 하느님이 영원한 상을 받기 위하여 계속 전진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인생의 목표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 목표에 도달하려고 누구나 장단기 계획을 세우고 필사적인 노력을 합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가 율법에 탁월한 바리새인이 되고 유대교에 돈독한 신앙인이 되려고 안간힘을 다하므로 어느 정도 소기의 목표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 지금까지 자기가 추구하고 획득한 종교적, 세속적 가치들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과거의 업적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결심을 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지금 70고개를 넘어 목회 현장을 떠나면서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볼 때 저 자신이 신학공부에 평생을 바쳤지만 학문적 업적을 남긴 것도 없고 목회를 하였다고 해서 성공적인 목회자가 된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어떤 공적을 쌓아서 표창을 받은 일도 없습니다. 바울처럼 자신 있게 자기의 업적을 자랑할 만 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바울과 제가 다른 점은 그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지만 저는 그 날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이것은 나의 능력이나 생각의 모자람에서 온 결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저의 인생을 후회하거나 탄식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 오늘까지 군목, 미국 보스턴 한인교회, 미국연합감리교회, 연세대학교, 화양교회, 신반포교회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목회활동에 종사해 왔습니다. 이 목회를 통해서 세상이 깜짝 놀랄 위대한 기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일관된 사실은 특수한 형태의 목회란 한 우물만을 파왔다는 것입니다. 미국 교회의 목회를 제외한다면 모두 청년, 지식인, 및 새로운 형태의 목회에 몸담아 왔는데 이것은 나의 의도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선택이고 부르심이었다고 믿습니다. 한 곳에 머물러 정착하지 아니하고 다양한 목장을 다니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였지만 늘 새롭고 실험적인 방법을 응용할 수 있는 도전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 저의 목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제가 한 곳에서만 머물러 있었다면, 더욱이 기성교회에서만 평생 목회하게 되었다면 목회에 질려 도망쳤거나 아니면 신경쇠약으로 유명을 달리 했을지 모릅니다.
제가 주로 공부하고 활동한 지난 20세기 후반은 참으로 격동기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6.25와 4.19, 군사독재와 경제개발, 민주화운동과 정보사회 등의 급변하는 경험을 치렀습니다. 그 와중에서 신학이란 학문에서도 여러 가지 조류가 나타났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신학이란 일종의 패션과 같은 것입니다.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따라서 성서를 적절하게 해석하는 일이 신학입니다. 그래서 지난 50년간 나타난 신학만 하더라도 신정통주의신학, 실존주의신학, 세속화 신학, 신의 죽음의 신학, 희망의 신학, 환경신학, 그리고 오늘의 다원주의 신학 등이 나타났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어떤 신학에 심취되고 고정되면 과거에 집착한 나머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다양한 신학들을 공부하고 취사선택해서 저 자신의 신학발전과 목회에 활용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신학에 있어서 불변의 진리는 신학은 항상 변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신념으로 계속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적용하려고 항상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은총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또한 신학이란 순수학문이 아니고 응용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에서 배운 것을 교회와 사회 현장에서 응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새로운 신학을 배워서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목장을 많이 갖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노래, 안무, 영화, 연극 등 새로운 매체를 동원해서 예배를 시도하므로 비판과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나 미래로 가는 길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이 새로운 시도는 대부분의 기독교대학 예배에서 없어서는 아니 될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새로운 역사는 미래를 설계하고 추진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미래지향적인 산물에는 우리 교회도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이색적이고 심지어 이단적으로 보이는 우리 교회의 모습은 과거지향적인 교회의 모습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비전과 용기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맙시다.”(갈 5:1)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독실한 유대인으로 율법에만 구원이 있다고 믿음으로써 율법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그 율법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향유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인의 삶을 자유인이 되는 것이라고 선포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정확하게 간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상 예수는 어떤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그는 자유인입니다. 그는 어떤 종교나 문화, 물질이나 관습, 민족이나 성 등 어느 것에도 종속된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권위와 권력과 물질을 부정하고 그 쇠 사술에서 벗어난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능동적으로, 자율적으로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였다는 의미에서 자유인입니다. 그는 자기의 생명과 삶을 하느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였고 그는 그 뜻의 최고 상징인 사랑을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몸소 실현하였습니다. 어떤 종교이던지 간에 참 종교의 극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유입니다. 인간 존재의 궁극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그것도 역시 자유입니다. 예수는 이 자유의 소유자이었습니다. 이 자유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케 하는 하느님의 영적 힘입니다.
저는 살아온 인생을 통해 지식과 명예와 물질이 필요한 때도 있었고 그것을 추구하기에 노력한 때도 있었지만 그것들에 얽매이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습니다. 물론 이 말은 상대적인 것이지 적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남 보기에는 탐욕적으로 보였을 때도 있었을 것이고 그런 비판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라면 일을 하다보니 그런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박대선 총장님이 학원사태로 위기에 처했을 때 제가 교목실장 겸 비서실장 직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해직당할 각오를 하고 모든 학교의 중요한 정보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학교의 비밀이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정부 당국은 물론이고 동료들도 독주한다고 오해와 비판의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동료들과 정보를 나누고 그들도 나와 행동을 함께 한다면 해직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제가 그를 아끼는 마음으로 의도적으로 그랬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값을 치르지 않고 공기를 마시며 살아갑니다. 공기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정신적으로 자유를 향유하며 사는 고등동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결단하고 책임지는 자유가 없다면 인간존재의 의미는 이미 잃어버린 것이고 그의 정신은 죽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공부에 일등하여 상 받은 적도 없고 돈을 많이 벌려고 샤일록처럼 수전노가 되지 않았고 명예를 탐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려고 생각해 본적도 없습니다. 그냥 그날그날 가장 편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따른 결과 소박한 인간이 되었고 또한 직업적으로는 이렇게 평범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목사의 아들이지만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 자유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나 어떤 신학 또는 이념에 고착되지 아니하고 그것을 배우고 비판하고 나의 입장을 결정하고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물론 저의 비전통적이고 자유 분망한 언행 때문에 비판이나 비난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전통적인 비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저의 신앙적 입장을 항상 새롭게 하면서 그것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삶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믿는 한 전통이나 관습이나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저의 자유를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공산주의와 군사독재 그리고 오늘의 사회주의 이념을 반대하는 이유가 인간의 생명인 자유를 제한하고 박탈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상생활에 있어서 제가 직업적인 목사나 교수이기 때문에 구애받는 일이 별로 없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차원에서 어느 누구와도 만나고 어울리고 즐길 수 있는 생각을 지니고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삶의 축제를 향유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예수께서도 죄인의 친구가 되었고 그들과 침식을 함께 하셨는데 제가 무엇이 길래 사람을 차별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참 자유인이 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1-13) 저는 이 말씀을 참 좋아 합니다. 그것은 저로 하여금 자유로운 인간으로 만드는 귀한 교훈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인생의 말년을 맞이해서 새로운 차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는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피곤하고 고뇌를 겪는 일도 없지 않았는데 이제부터는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습니다. 무한대한 자유의 바다에서 구원을 위해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또 하나의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럼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1: 18-21)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힌 몸으로 자기의 일생을 회고하고 미래의 운명을 예견하면서 비장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일생을 투자하였고 앞으로 어떤 위험에 부딛친다고 할지라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높임을 받는 삶으로 끝내야 한다는 비장한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날들을 생각할 때 한 인간으로써 좀 더 성실하게 살지 못한 죄책감 같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님에게 각별한 효도를 하지 못한 것, 나를 가르치신 스승들에게 좋은 제자가 되지 못한 일 등입니다. 그러나 한 거름 더 나아가서 내가 직업적인 목사로서 과연 그리스도의 산 증인이 되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목사가 신앙생활이란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로는 강조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목회자의 언행이 교우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가나다의 어떤 노파가 세례문답을 받을 때 당신은 예수님을 아느냐고 하니 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 그는 우리 목사와 같이 생겼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또한 목회자로 가장 중요시해야 할 덕목은 예수님처럼 신앙과 생활, 말과 행동의 일치와 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는 직업상 말을 많이 해야 하고 그것도 성경의 진리,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수없이 설교해야 하는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자기 말한 만큼 언행을 일치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열심히 가르치기는 해도 몸소 실천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서로 나누기를 힘쓰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라고 말하지만 목사의 주머니에서 단돈 만원을 빼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서로 비방하거나 싸우지 말라고 설교하지만 목사의 세계를 보면 시장바닥이나 국회를 뺨칠 정도로 갈등과 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어떤 주일 낮 예배시간에 사모님이 이불을 가지고 강단 위에 올라와서 설교하는 남편에게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여기서 살자”고 하였답니다. 남편이 강단에서는 갖은 미사여구로 떠들지만 가정 안에서는 그 말에 따른 모범적인 생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아내를 폭행하는 목사들이 많아서 사모들이 상담실을 찾는다고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신념으로 삼았고 그리스도인이면 반드시 이것을 지켜야 한다고 믿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성취해야 할 신념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고백한 것처럼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이 약해서 실천 불가능한 진리라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얻은 결론은 언행일치가 매우 값진 덕목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우심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고백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약점과 허물이 많은 제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대변자의 역할을 할 때 신앙과 생활 사이의 거리 때문에 복음의 빛을 가리는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하는 자책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일례로 우리 교회에 다녀간 교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우들이 마지막 인사도 없이, 마치 원수진 것처럼 사라진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물론 불가피한 원인도 있겠지만 제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써 모범적인 역할을 충실히 못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각기 자기의 신앙노선과 취향을 따라 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는 것이 평소의 제 생각입니다. 그러나 목사의 결함이 얼마나 많으면 인사도 없이 떠나갈까 생각하면 한 편 섭섭한 느낌도 있지만 다른 한 편 부끄러움과 낙제한 목사라는 자책감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가지 만은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비록 능력이나 영성이 부족한 인간이지만 최소한 인간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목회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깨닫지 못하고 극복할 수 없는 인간적인 약점과 한계와 이중성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분히 전하지 못하고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죄와 허물을 인정하고 하느님과 여러분의 용서를 빌 뿐입니다.
이제 제 인생의 태양은 석양으로 기우러지고 해 질 무렵도 멀지 않았습니다. 이 순간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까지 목회의 길로 불러주신 하느님과 제가 일생을 통해 만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눈 모든 동료 신앙인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앞으로 남은 인생을 제 자신과 가족, 교회와 사회를 위해 보람되고 성실하게 살아가겠다는 것뿐입니다.


후회 없는 인생 2004. 4. 18.
빌립보 3:12-16, 갈라디아 5:1, 빌립보 4:11=14
이계준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