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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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의 삶 가운데는 여러 만남이 있습니다. 시대와 그 사회의 만남이 있고, 환경과 그 지역의 만남이 있습니다. 교회와 사람의 만남이 있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만남들은 매우 소중합니다. 그런 만남들이 어우러져 좋은 교회를 이루기도 하고 훌륭한 삶을 창조하기도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참으로 귀중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님과의 만남입니다. 저는 사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피부로 확실히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서 “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의 아버지는 완전 시골분이십니다. 그래서 참 잔정이 많으십니다. 그 잔정이 때로는 심각할 정도입니다. 어머니가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제가 들어가면 손수 밥을 다 차려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빨리 빨리 먹어라” 저는 집에서 “빨리 빨리”라는 단어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듣습니다. 뭐가 그렇게 빨라야만 하시는지...
그리고 아버지는 제 이불자리를 늘 펴주시고, 제가 차를 타고 나가면, 주차장이 없고, 주택가이기에 늘 주차할 곳을 이리저리 찾으시느라 분주하십니다.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제가 그 사랑이 너무 과해서 싫어하는 모습만 보여도 섭섭해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 사랑을 받는 것도 효도라 생각하여 열심히 받고 있습니다. 제가 부모님과의 만남이 귀중한 만남이라는 것은 부모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통해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또한 받은 사랑을 제가 이제는 타인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만남이 없었다면 저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저에게 있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 분은 신당제일 감리교회의 장학일 목사님입니다. 이 분은 부흥강사이기 때문에 정말로 바쁘고 분주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주 먼 지방이나 외국으로 나가지 않는 한, 잠을 3-4시간 자면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십니다. 어느 날은 부흥회를 인도하시고, 새벽2시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목사님에게 새벽기도회를 맡기지 않고, 본인이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새벽기도회 전 찬양을 하시는 데,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의 옷이 이상한 것입니다. 분명히 넥타이를 매셨는데, 와이셔츠가 없고, 메리야스만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살색으로 된 와이셔츠인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와이셔츠가 아니라 메리야스에 넥타이만 메고 나오신 것입니다. 찬양이 끝난 뒤에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너무 정신 없이 나오는 바람에 와이셔츠를 입지 않고 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웃니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양복바지를 입지 않으시고, 잠옷 바람으로 나오셨던 적도 있습니다. 저는 그 분을 통해서 “성실”이라는 삶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모든 일에 있어서 성실하려고 노력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세 번째로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반포교회와의 만남입니다. 어느덧 벌써 제가 2년정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신반포 교회를 통해서 현재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 만남이 저를 성숙시키는데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이계준 목사님을 통해서 새로운 교회의 모델과 신학, 목회자의 자세를 배우게 된 것 같습니다. 신반포 초창기에 계셨던 림학춘 목사님은 이계준 목사님을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이 림목사님에 대해서 저는 잘 모르지만 가슴이 뭉클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에 대한 돈독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손원영 목사님은 ‘진정한 스승’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도 이계준 목사님의 만남을 중요해서 호칭을 하나 찾아야 하는데, 고민을 해도 호칭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믿음의 아버지’라 부르기에는 저와 목사님의 나이차이가 많이 나고, ‘믿음의 할아버지’라 부르기에도 어색하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기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등이 떠올라서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좋은 명칭이 있으면 저에게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신반포 교회를 통해서 목회관이 변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 만남들이 저에게는 소중한 만남들입니다.
여러분의 삶도 그런 수많은 만남, 인연(因緣)으로 엮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연 중에서 나쁘고 불행한 만남을 악연(惡緣)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악연’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말이 되어 있고, 그 반대어로 쓰일 만한 ‘선연(善緣)’은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사실 ‘선연’은 큰 사전에서나 볼 수 있는 어휘입니다. 따라서 악연은 그만큼 흔하지만 선연은 귀하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소중한 만남, 귀중한 만남에 반해서, 정말 악연과 같은 만남들이 있습니다. 불화와 미움이 가득한 만남이 있습니다. 이번 주에 뉴스를 통해서 아주 끔찍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스물네 살의 아버지와 스물두 살의 어머니가 네살된 아이, 두살과 한살된 아이를 양육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스무살 때, 어머니는 열여섯 살 때 첫 아이를 가진 것 같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니 결혼 못한 저보다는 분명히 어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부싸움을 하게 된 어린 아버지와 철부지 어머니는 화가 난다고 자신들의 자녀들을 그대로 방치해 둔 채, 집을 며칠 동안 떠나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철새류에 속한 듯싶습니다. 아이들은 부모 없이 방안에서 며칠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면서 보내야만 했고, 어린 한살짜리 아이는 자신이 싼 배설물에 온몸이 더럽혀진 채로 지내야만 했습니다. 다행히 주민들의 발견으로 아이들은 아동보호시설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 부모님과 아이들의 만남이 비록 필연(必然)이지만, 부모가 반성하여 키우지 않은 한 정말 큰 악연일 수밖에 없습니다.

2. 성경에도 보면 악연과 같은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과 에서의 만남입니다. 태어날 때부터도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먼저 태어나려고 하다가,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난 것이 바로 에서입니다. 서로의 첫만남 자체부터가 경쟁과 불신이 었습니다. 그리고 야곱과 에서의 극적인 불화와 불신은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가로챈 사건이었습니다. 야곱은 형의 보복과 죽음이 두려워서 멀리 도망가게 됩니다. 에서에게 있어서는 야곱이 절대적인 원수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동생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을 절대로 만나지 않았어도, 자신의 장자권을 쉽게 잃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에서는 야곱의 만남을 철저하게 악연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정든 집과 부모형제를 떠나 오랜 기간 살아가게 됩니다. 고향이 그리운 야곱은 형인 에서와의 갈등과 불화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향해 떠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에서가 야곱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군사 400인을 끌고 나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 32장의 말씀은 야곱이 자신을 죽이려는 에서를 만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잠 못 이루는 야곱의 두려워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떤 야곱은 홀로 깊은 시름에 잠기게 됩니다. 장막을 떠나 얍복강 나루터에 앉아 한밤을 지새웁니다. 그 때 천사가 나타나 야곱과 한판의 씨름을 하게 됩니다. 동이 터 오자 떠나려는 천사를 붙잡고 자신을 축복해 달라는 야곱에게 천사는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붙여줍니다. 이스라엘(하나님이 다스리기를)이란 이름은 ‘하나님과 겨룬 사람’이란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천사와 헤어진 뒤에야 그가 하나님이었음을 깨닫고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부릅니다. ‘브니엘’은 하느님의 얼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곧 ‘브니엘’을 만났던 야곱은 그 이후에 자기를 보면 죽일 줄 알았던 에서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서로 불화와 미움을 가지고 있었던 형제들은 만나자 마자, 눈물의 장이 됩니다. 둘은 서로 껴안고 입을 맞추고 펑펑 울게 됩니다. 33장 10절 말씀에서 야곱은 형 에서를 껴안고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을 통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불신과 미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천사를 만난 장소를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장소의 이름을 지은 것과, 형 에서를 만나서 형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야곱의 고백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면 죽을 것으로 알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금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라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을 줄 알았던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알고 야곱은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이 생명으로 바뀐 그 자리를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이름 지은 것입니다.
이어서 동일한 사건이 형 에서를 만나면서 일어나게 됩니다. 형 에서의 얼굴을 보는 날이 죽는 날인 줄만 알았던 야곱에게, 그날은 죽음의 날이 아니라 바로 화해와 뜨거운 형제애를 회복하는 날이었습니다. 형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봄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미움이 사랑으로 변하고 싸움이 평안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 에서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라고 야곱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그 자리 ‘브니엘’은 곧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난 자리와 동일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은혜입은 자로서 이제 자기 형에게 은혜를 입게 됩니다. 야곱에게 에서와의 화해는 하나님의 은혜만큼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과 또 은혜를 입은 것)처럼 형님의 얼굴을 뵙습니다.” 라고 형을 높여 하나님과 견주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그 자리는 미움이 변하여 사랑으로, 불신이 변하여 믿음과 화해와 일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넘치는 자리입니다. 그것은 미움이 변하여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자리이며, 불신이 변하여 믿음과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자리입니다.

4. 우리들의 만남인 가정 속에서의 불화와 형제간의 갈등과 사회에서의 대립이 점점 더 심해져 가는 오늘, 가정과 사회등 모든 우리의 만남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만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만남이 이루어지는 가정과 교회, 직장, 사회가 진정한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셨답니다. 할아버지는 덩치가 작았고 할머니는 넉넉한 체격이었습니다. 하루는 함께 길을 걸어가다가 화해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을 겁니다. “할아범, 우리 이렇게 걸어가는 것이 심심하니까 나를 좀 업어줘요” 남자 체면에 못 업는다고 할 수도 없고 해서 할어버지는 “그럼 업혀봐”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무거운지 겨우 일어납니다. 힘들어하는 할아버지를 보니 할머니도 미안했던지 이렇게 묻습니다. “생각보다 무겁죠?” 이 때 할아버지가 “무겁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업어주니 행복해”라고 하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할아버지는 “당연히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간은 부었지, 얼굴은 철판을 깔았지 그러니 안 무거워!”라고 합니다. 할머니는 속이 상합니다. 괜히 업어달라고 했다고 후회하고는 할아버지 등에서 내립니다.
다시 말없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걷습니다. 이렇게 서먹하게 걷다보니 이제는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아까는 미안했네. 이제는 할멈이 날 좀 업어주구려” 할아버지가 워낙 덩치가 작으니까 업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업습니다. “생각보다 가볍지?” 할어버지가 묻자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연히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는 바람이 들었지, 가진 것도 없지, 그러니 당신이 무거울 리가 있어?”
이 이야기로 웃을 수 있지만 정말 의미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부와의 만남 속에서도, 자녀 간의 만남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비난과 불화보다도 하나님의 얼굴로서 남편과 아내, 자녀를 바라보며 미움과 불화의 만남이 사랑과 신뢰, 믿음이 있는 만남의 가정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얼마전에 어느 교회에 대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공동체는 항상 불신과 미움, 불일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처음으로 하나의 의견을 모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 로또복권이 한창 열풍일 때 어느 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이 회비를 다 모아서 로또복권을 샀다고 합니다. 워낙 큰 교회였기 때문에 그렇게 모아진 돈이 모두 오백만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돈을 털어 복권을 사서는 한자리에 모여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써보는 겁니다. 그리고는 작정기도에 들어갑니다. 마냥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하나님 한 번만 맞춰주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이렇게 사울 것이고...” 라는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만원짜리 10장만 달랑 당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또 분열과 불신에 빠지게 되었다는 선배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참 한심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회의 공동체가 어떤 이익과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얼굴’이 드러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랑과 일치를 가지고 그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만남들이 바로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는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는 만남이란 만남 속에서 서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게 그 만남은 야곱이 이름 지었던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난 ‘브니엘’의 만남이라 불릴 것입니다.

제목: 브니엘의 만남
말씀: 창세기 32장 27절-29절
창세기 33장 8절-1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