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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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마 전 일간지에 언더우드 4세가 한국을 떠난다는 소식과 함께 그 조상들의 업적에 대한 기사가 실린 것을 보신 분이 많을 줄로 앏니다. 언더우드 1세가 이 땅에 온지 119년만에 그 자손들이 이 곳을 떠나가는 것입니다. 한 가문이 한 곳에서 100년 이상을 같은 목적과 일은 위해 인생을 바치며 희생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자기 나라나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방지대에서 그렇게 하였다니 다만 숙연한 느낌이라는 말 밖에 다른 표현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언더우드 1세 원두우 목사가 이 땅에 온 19세기 말의 우리 사회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최악의 조건이었습니다. 가난과 질병, 무지와 당쟁, 사회계층의 심화와 정신적 혼란으로 가득 찬 시대이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원두우 목사는 전혀 알지 못하고 위험이 널려있는 이방지대 한국에 온 것입니다.
원두우 목사는 지금 예원학교 자리에 새문안 교회를 세우고 경신학교를 설립한 다음 1916년 서울에 연희대학을 설립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평양에 숭실전문학교가 있다는 이유로 미국의 선교부와 한국에 와 있는 선교사들이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신을 급히지 않고 모금하여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었고 연세대학교의 창립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문화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언젠가는 일제에서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민족이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2세인 원한경 박사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연희전문학교로 돌아와서 교육학을 가르쳤으며 제3대 교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1951년 6.25 전쟁 당시 심장병으로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부인이 1949년 공산당의 테러로 목숨을 잃는 비극을 맛보기도 하였습니다.
3세인 원일한 박사는 6.25가 일어나자 한국을 돕기 위해 해군에 다시 입대하여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하였고 UN군 정전협상 수석 통역관을 지냈습니다. 그후 원 박사는 연세대학에서 교육학 교수로, 이사로 활동하였고 한미 우호증진에 공헌한 바가 큽니다. 더욱이 원일한 박사는 평생을 할아버지가 세운 새문안 교회의 교인으로, 장로로 시무하면서 교회발전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 3세와 오랜 동안 함께 지내면서 대학 행정에 참여하였습니다. 원일한 박사는 인간미가 넘치고 유머 감각이 뛰어나면서도 매사에 신중하고 공명정대한 철학을 가진 인격자이었습니다. 그는 수 개월 전에 세상을 따났습니다.
4세인 원한광 박사는 오랜 동안 연세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지금은 한국과 미국의 교육 및 문화사업을 관장하는 한. 미 교육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고 있습니다. 저도 미국 유학 갈 때 이 위원회가 주는 장학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언더우드 가문의 마지막 주자인 그는 오는 10월에 미국으로 돌아가 말년을 보낼 작정이라고 합니다.
지금 합정동에 위치한 외국인 공원묘지에는 언더우드 1, 2, 3세와 그 부인들이 한국에서 순교한 많은 선교사들과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무엇이 이 언더우드 가문으로 하여금 119년 동안 낯서른 이국 땅에서 살고 일하고 죽게 하였을까요? 그들이 추구했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속적인 욕망 곧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런 세속적인 욕망의 노예이었다면 자기 나라에서도 충분히 성공하였을 것이고 또한 여기서 그것을 위해 살았다면 10년이 못가서 실패하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한 세기가 넘도록 이 땅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적인 사명과 우리의 어두운 현실을 서구의 발전된 지식으로 밝혀주려는 지성적 의지였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 가문은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캄캄한 나라에 와서 목숨을 희생하면서 1세에서 4세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살고 일하고 죽고 묻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그 가문이 4대를 통해 지키고 나타낸 신앙과 헌신입니다. 그 가문은 대대로 조상의 신앙과 정신을 존중하였고 그것을 보존하려고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살고 일하고 죽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그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있는 재산을 모두 대학에 기증하고 마지막으로 차지한 것은 한 두 평 정도의 무덤 뿐입니다.

2. 저는 언더우드 가문의 신앙과 업적을 생각하면서 아브라함이 우리 후손들에게 남긴 신앙의 전통을 연상해 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8-10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풀어서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믿음 안에서 순종하고 미래 자기에게 주실 땅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집을 떠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 안에서 약속하신 땅에서 외국에 사는 나그네처럼 생활하였고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 위에 세울 도시를 바라보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언더우드 가문의 신앙과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그 가문의 믿음과 헌신이 아브라함의 신앙에 기초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언더우드 1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순종하고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형편인지도 모른채 자기 나라를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와서 일평생 나그네 생활을 하였고 1세에서 4세까지 열약한 환경에서 일하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들은 암흑의 세계, 희망이 없는 나라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좌절이나 절망을 물리치면서 바로 이 땅이 하느님이 계획하시고 건설하실 나라가 되리라는 희망과 확신 속에서 인생을 불살았던 것입니다.

3. 우리는 언더우드 가문이 택한 아브라함의 모범에서 몇 가지 신앙의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신앙은 우리에게 모험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언더우드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믿음 안에서 갈 곳을 알지 못하고 집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취할 수 있는 최대의 모험입니다. 우리 인간은 육신적으로나 또는 정신적으로 언제나 자기의 집, 자기의 고향을 좋아하고 거기에 영원히 눌러 살기 원합니다. 미국이 좋다고 이민 간 교포들이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고향이란 어머니의 모태처럼 생명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향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그 곳에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과거의 습관, 생각, 이념, 가치를 모두 털어버리고 벌거숭이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난 50년 간 남북의 이념 차이로 그렇게 고생하고 전쟁을 치르고 수 백만의 생명이 죽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사회에 사회주의 이념이 부활한다는 것, 그리고 특히 지난 50년 간 헌법과 정권이 여러번 바뀌고 혁명과 구데타가 판을 쳤지만 사회의 고질병인 부정부패는 끈칠 줄 모르는 것, 이기주의를 위해서는 이웃이나 법까지 무시하고 패거리를 지어 다니는 행태 등은 인간이 자기의 고향 떠나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우리가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고향을 떠나야 우리를 얽매는 모든 쇠사술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하느님만 의지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나 성 어거스틴이나 존 웨슬리처럼 과거의 낡은 신앙과 사상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모험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새로운 존재가 되었고 위대한 신앙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결단과 행동에서 오는 모든 불이익을 스스로 감수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를 편리하고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하고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곳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한 발자욱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고 새로운 것을 생각하거나 또는 창조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과거의 집착하지 아니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도전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신앙의 조상이 되었고 언더우드 가문이 산 설고 물 설은 이 땅에 와서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하였기 때문에 새문안 교회와 연세대학교라는 귀한 상징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비록 약속의 땅에서 살면서도 외국에서 사는 나그네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나라나 고향이나 자기 집에서 산다는 것과 외국이나 타향이나 또는 셋집에서 산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나 생활에 큰 차이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자기 나라, 자기 고향, 자기 집에서 살게 되면 심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안정되게 생각하고 계획하고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인 경우에는 낯설고 적응이 어렵고 모든 일을 임시적으로 생각하고 계획해야 하기 때문에 불안정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진실한 믿음의 생활을 하려고 할 때 우리의 인생 자체가 나그네의 행각이기 때문에 생각이나 생활은 안전하거나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임시적이고 유동적이며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등을 제한하고 부정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그네 길을 가는 사람이 자기가 욕망을 다 채우면서는 자기 순례의 길을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 세상의 나그네인 이상 생명이나 소유, 이념이나 신앙 마저도 내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라는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그네란 말은 인간의 생명이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고, 등에 지고 다니는 물건도 별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나그네의 심정으로 하루 하루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느님께서 만나와 매추라기를 내려주시면서 하루 먹거리만 챙기고 몇일 분씩 저장하지는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믿음이 없고 생각이 아둔하여 먹거리를 가지고 욕심을 부리다가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서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가 영원한 삶을 누리는 축제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이북 공산주의를 피해 18세에 고향을 떠나 남쪽에 와서 피난민이란 나그네로 처절한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르바이트하는 신학생으로, 군대 막사에 기거하는 군목으로, 생소한 미국유학과 목회로, 아는 사람이라고는 총장 밖에 없는 대학생활로, 그것도 5년간은 대학에서 쫓겨난 집시 인생 등으로 지난 것을 생각하면 결국 내 삶도 어쩔 수 없이 나그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인생의 말년에서 앞으로 올 일들을 생각하면 결국 이 세상에 나그네로 와서 나그네로 살다가 나그네로 홀로 떠나갈 수밖에 없음을 예감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고스란히 이 땅에 놔두고 영원한 나그네의 길을 떠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그네의 인생은 고독하고 비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그네 행각을 좀 달리 생각해 보면 긍정적인 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 1.4후퇴 당시 고향의 집과 재물을 모두 헌 신짝처럼 버리고 남하하였기에 지난 50년간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1인 독제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비교적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에서 나그네이지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어 선생이 되려는 나를 하느님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 신학하는 나그네로 부르시고 교회와 대학을 섬기는 나그네로 만드셨습니다. 더욱이 이 나그네의 길을 여러분과 함께 즐기면서 20여년 간 함께 갈 수 있는 특권과 은총을 주셨으니 하느님의 부르심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이나 언더우드 가문처럼 믿음의 나그네가 되어 하느님이 소명을 따라가면 비록 배곺으고 고닲으고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고 기쁨과 헌신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집을 떠나야 집의 귀중함도 알고 인간적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의 오늘의 미숙하고 불완전한 신앙과 이념에서 떠나 내일을 위한 새로운 신앙과 이념의 길을 찾아가야 성숙하고 온전한 인격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 나그네의 행각은 오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숨이 살아있는 한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야곱이 외로운 광야에서 만났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영원한 도시, 희망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방지대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도 미래 하느님이 건설할 도시를 꿈꾸면서 살았습니다. 그 도시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곧 하느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이 창조한 위대한 종교 유대교이고 이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교의 진리 속에는 사랑과 정의, 자유와 평화가 가득 차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 안에서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희망 속에 미래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영원한 도시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언더우드 가문이 이 땅에 왔을 때 희망이란 빛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가난과 무지에 찌들고 싸움과 무질서가 난무하여 언제 멸망할지 알 수 없는 풍전등화와 같은 사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가문은 하느님의 섭리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리라는 희망가운데 사랑과 정의, 자유와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데 헌신적인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그 4세대는 교회와 대학을 통해 빈 강정같은 이 나라에 복음을 통해 어둠에서 빛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하느님이 설계하신 영원한 도시를 향해 용감하게, 희생적으로 행진을 계속한 결과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한 시대에 태어나서 주어진 현실에서 사는 동시에 그것을 더 발전시켜야 하는 책임과 희망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도시를 계획하고 건설하려면 설계도가 먼저 있어야 하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도시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이 미래의 도시 건설에 참여하는 것은 하느님이 준비하신 설계도를 보고 그것에 따라 활동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느님의 설계도 없이 세운 환상적인 도시가 얼마나 많았습니다. 고대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에집트와 막강한 힘을 과시한 로마제국이 그랬습니다. 근대에 와서는 히틀러가 세운 독일의 오만한 제3공화국이 그랬고 일본의 군국주의가 그랬으며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철학으로 피의 역사를 물드린 스탈린의 소련이 그랬습니다. 오늘은 자유와 민주 위에 건설된 미국이 세계 최대강국이란 교만으로 인해서 그 빛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한 때 잘 나가던 대한민국도 하느님의 설게도가 아닌 인간의 이념이란 설계도로 수도를 건설한다, 나라를 개혁한다고 야단이지만 그 결과는 건설과 개혁은 고사하고 인류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의 한 가운데 있는 우리가 아브라함과 언더우드 가문이 하느님이 설계하시는 미래의 도시를 희망하면서 살아갔다는 것을 귀한 신앙의 유산으로 받아드린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희망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자신의 희망이나 환상에 사로잡혀 술취한 사람 모양으로 무책임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바로 그 신앙 위에서 그의 계획하시는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복음의 진리 곧 사랑과 정의, 자유와 평화를 토대로 해서 설계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나라 건설을 희망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진리를 알고 희생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확신과 미래의 희망과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자기 희생이 합쳐질 때 새로운 도시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고 이 땅에 와서 4세대가 살아간 언더우드 가문의 신앙과 업적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의 역사는 인간이 신앙을 바로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가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을 떠나 외로운 나그네가 되었고 절망 속에서 희망의 미래로 나아가는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이렇게 부름받은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은 신앙의 심각성이나 정신적 유산의 귀중함을 소월이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 신앙과 역사적 유산은 오늘 우리를 있게 하는 생명과 같은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신앙의 조상들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경청하고 나그네의 길을 선택하며 어두운 현실에서 밝은 미래를 바라보며 헌신적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적 유산이 4대 뿐만 아니라 10대, 20대 계승됨으로써 하느님의 축복으로 가득 찬 가정과 나라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름받은 나그네 2004. 5. 23.
시편 39:12-13, 히브리 11:8-10
이계준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