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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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08

수치심이 들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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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이 들 때

빌립보서 3: 4-16
2004. 6. 6(신반포교회, 손원영목사)
1.
최근 우리사회의 지도층에 계신 분들이 자살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고 있습니다. 남상국 대우사장이 한강에 투신하여 자살을 하였고, 안상영 부산시장이 자살을 하였고, 박태영전남도지사도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틀전에도 이준원 파주시장이 비리혐의로 내사를 받던 중 한강에 투신하여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최근 이렇게 사회의 지도층에 계신 분들이 쉽게 소중한 목숨을 끊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각 분야에서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에 계신 분들이 많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자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왠 만하면 꾹 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사실은 사회의 지도층만 자살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제 언론에 보도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 증가율이 OECD 국가중 1위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6월 4일 “OECD국가의 자살사망율 및 변화추이자료”를 발표하였는데, 터키를 제외한 29개 회원국 중 인구 10만명망 자살자 수는 한국이 18.1명으로 헝가리(24.3명), 필란드(20.4명), 일본(20명)에 이어 4위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최근 10년간 연평균 자살율은 1%로 수위를 차지했습니다. 이것은 2위 멕시코(0.61%), 3위 일본(0.44) 등을 거의 2배로 크게 앞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가 자살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어야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이들이 그렇게 소중한 목숨을 버릴까요?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까요? 참으로 궁금한 일입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기에,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수치심 때문이 아닐까?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에, 숨고 숨다가 더 이상 숨을 곳을 찾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물론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기 때문에,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이면에 숨어있는 수치심, 창피함, 부끄러움, 자존심의 상처, 이런 것들이 복합된 작용을 하여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수치심과 같은 이런 감정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하고, 자살하겠다는 마음까지는 아니라할지라도 정말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던 수치심을 경험했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얼마전 저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수치심을 느꼈느냐고요. 그랬더니 여러명의 학생들이 이런 대답을 하였습니다. 한 남자 학생은 화장실을 잘못 찾아 여자화장실에 그만 들어갔다가 여자를 만났을 아주 수치심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학생은 중학교 때 외박을 하였는데, 그 일로 인해 아버지에게 허벅지에 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혼낸 다음 아버지는 자신에게 시내에 다녀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종의 반항심으로 시위하기 위해 벌겋게 피멍이 든 장단지를 드러낸 채 일부러 짧은 반바지를 입고 다녀왔다고 합니다. 철이 든 후, 그 일을 생각하면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 일을 수치스럽게 느껴진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한 학생은 가득이나 노래를 못하는데, 선생님께서 “너 정말 노래 엄청나게 못하는구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창피하고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 수치스러운 느낌을 가져보았습니까? 그리고 그 때 여러분은 그 수치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였습니까?
저도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곰곰이 생각하면 수많은 수치심을 느끼면서 살아온 것 같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가장 기억에 나는 수치심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농부이셨습니다. 그리고 종종 농사지은 채소나 과일 같은 것을 시장에 내다 팔곤 하였습니다. 하루는 제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왁짝찌걸 떠들면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저 멀리에서 아버지가 손수레를 끌고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아버지는 아직 저를 보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때,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친구들보다 다른 길로 가자고 제안을 했고, 저는 아버지를 피해 다른 길로 간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 때, 저는 농사꾼이셨던 아버지에 대하여 일종의 수치심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함께 가던 친구들의 아버지는 학교의 선생님도 있었고, 부자도 있었고, 동네의 유지도 있었지만, 저의 아버지는 단지 얼굴이 검게 그을린 농부요, 지금 손수레를 끌고 오는 볼품없는 모습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아버지에게 얼마나 죄송한지 모르겠습니다.
또 이런 기억도 있습니다. 제가 자란 동네는 워낙 유교적 풍토가 강해서 어른들이든 학생들이든 교회에 나가는 것이 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종종 바쁜 농번기에도 곱게 차려입고 교회에 가는 사람들을 향해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 예수쟁이는 못말린다” 등으로 비아냥거리곤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중학교 2학년 말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처음에 교회에 가는 것이 왜 그리 부끄럽고 수치스러운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갈 때, 떳떳하게 가질 못하고, 사람들이 있는 곳을 피해 마을을 돌아서 교회에 갔고, 또 사람들에게 들킬 새라, 성경책을 가슴에 숨긴 채 그렇게 달려가곤 하였습니다. 목사가 된 지금도 성경책을 팔장에 끼고 다니는 것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습니다. 지난주 김준년권사님 댁의 입주예배가 있었는데, 예배를 마친 후 성경책을 그 집에 놓고 왔는데, 아마도 이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종종 당당하게 성경책을 끼고 교회에 다니는 분들을 보면, 한편으론 매우 어색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수치스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2.
미국 에모리대학교에 제임스 파울러라는 기독교교육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하바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 대학에서 교수를 하다가 에모리에 스카우트되어 간 분입니다. 그는 <신앙의 단계들>(Stages of Faith)이라는 책을 써서 일약 스타가 된 학자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읽어본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신앙의 단계들이란 책을 쓴 후, 10여년이 지나 다시 아주 유익한 책을 하나 썼는데, 그것은 <충실한 변화>(Faithful Change)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신앙인의 성숙된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한 책으로써, 종교심리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아주 유익한 책입니다. 특히 이 책에서 그는 수치심에 대하여 자세하게 논의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치심이란 “자아가 손상되었을 때 느끼는 부정적 정서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는데, 그에 의하면 수치심의 종류를 크게 다섯가지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건전한 수치심입니다. 둘째는 완벽주의적 수치심입니다. 셋째는 귀속적 수치심입니다. 넷째는 중독적 수치심입니다. 다섯째는 무수치심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건전한 수치심이란 일종의 이런 수치심입니다. 내가 우연히 어떤 사람을 만났다고 합시다. 그는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외모도 변변치 못하고, 가방끈도 나보다 짧습니다. 그런데 그와 우연히 한시간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정신적으로 성숙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공부는 많이 못했지만 매우 합리적이고, 특히 신앙적으로 아주 사려깊으며 사랑의 인품이 풍겨나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때, 나는 갑자기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았구나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일종의 건전한 수치심입니다. 나보다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갖게 되는 부끄러운 감정이지요. 우리는 종종 학문적으로 뛰어난 학자를 만나거나, 신앙적으로 매우 성숙한 사람을 만났을 때, 혹은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 들어갔을 때, 나의 형편없는 자아의 모습을 반성하면서 그들처럼 되려고 결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건전한 수치심입니다. 이러한 수치심은 나에게 많으면 많을수록 나의 신앙과 인격이 성장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둘째는 완벽주의적 수치심입니다. 이것은 나를 키워준 부모님이나 선생님, 혹은 보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완벽을 추구하다가 가끔 그 기대에 못미쳤을 때 갖게 되는 수치심입니다. 이 수치심은 대개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에게,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발견됩니다. 부모가 박사이니까 적어도 아들도 박사가 되야 한다든지, 상류층사람답게 복장을 신사 숙녀처럼 말쑥하게 항상 차려입어야 하고, 항상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다녀야 하며, 손톱도 짧게 잘라야 한다는 등등 최고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 기준에 미달되었을 때, 부모나 자녀가 각각 갖게 되는 수치심은 바로 완벽주의적 수치심입니다. 이러한 수치심에 익숙한 사람들은 출세도 잘하고, 사회적 성공도 잘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중년기에 접어들어서 큰 위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중년기에 번 아웃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러한 완벽주의적 수치심은 우리를 세상적 성공으로 인도하는 데에는 어느정도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작은 실수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기 때문에, 종종 열등감에 빠지게 하거나 자학하도록 만듭니다. 아마도 앞에서 예로 들었던 남상국사장이나 안상영부산시장 같은 사회지도층들의 자살의 원인이 바로 완벽주의적 수치심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셋째는 귀속적 수치심입니다. 이 수치심은 사회적 편견 때문에 생기는 부정적 정서입니다. 예를들면, 앞에서 제가 저의 아버지에 대하여 갖는 수치심이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교사는 훌륭하고 농부는 별 볼일 없다는 사회적 편견, 이 편견으로 인해 저의 모습은 한 때 수치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러한 수치심은 우리사회에 매우 뿌리깊이 녹아져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좀 바뀌었습니다만, 과거 호남사람에 대한 사회적 편견 속에서, 호남사람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숨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곧 귀속적 수치심입니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가 그것을 이웃에게 오랫동안 숨겨왔다면, 그 사람도 귀속적 수치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저의 경험을 말씀드렸던 것처럼, 유교가 보편화된 상황에서 기독교는 좀 덜 된 사람들이 믿는 종교라는 사회적 편견이 있다면, 기독교인은 아마도 그 상황에서 귀속적 수치심을 느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마치 제가 교회갈 때 성경책을 당당하게 들고 가지 못하고, 가슴에 숨겨갖고 간다면 그 수치심을 피하고자 하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편견과 차별은 없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편견과 차별에 따른 귀속적 수치심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극복해야할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넷째는 중독적 수치심입니다. 이 중독적 수치심은 나에게 부끄럽다고 생각되는 것을 방어가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숨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이중인격적인 모습을 의미합니다. 예를들면, 부모님이 종종 심하게 부부싸움을 한다고 할 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고 싶은 부정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숨기기 위해 부모님을 존경하지도 않으면서, 만약 내가 항상 같은 방식으로 남에게 부모님을 존경한다고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나의 이중적 모습을 고착시키고, 중독적 수치심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우리 신앙인에게 좋은 모습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 역시 우리가 극복해야할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무수치심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당연히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상황에서도 얼굴이 붉어지지도 않고, 목소리가 떨리지도 않으며, 그 어떠한 심리적 반응도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무수치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수치심은 우리말로 하면, 전형적으로 “뻔뻔하다”라든지 혹은 “얼굴에 철판깔았다”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에 과거보다 지금 현재 무수치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아마도 4년 내내 싸움만 했던 16대 국회의원들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상의 다섯가지 수치심의 분류에서 보듯, 수치심이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완벽주의적 수치심이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을 자살로 이끌수 있고, 무수치심이라든지 중독적 수치심, 그리고 귀속적 수치심 같은 것은 우리가 거부해야할 수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과 인격을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전한 수치심도 중요한 작용을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안타까운 것은 사회가 각박해 지면서,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건전한 수치심은 줄어들고 오히려 우리가 버려야할 부정적인 수치심은 더 늘어나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문제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게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3.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바울의 신분과 관련된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고 나서 그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수치심의 유형과 연결시켜 한번 생각하면, 그는 본래 완벽주의적 수치심이 강했던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했듯이 타고난 신분상 대단한 가문의 사람이었고, 공부도 많이한 대단한 학자였습니다. 얼마나 대단한지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율법의 의로는 흠잡힐 데가 없습니다.”(5-6절)
한번 보십시오. 그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의미는 그가 순수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귀화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았는데, 그는 그런 종류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순수한 혈통을 갖고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베냐민지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가 왕족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었던 사울이 바로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다윗 후 유다지파가 왕족으로 내려왔지만, 이스라엘 최초의 왕을 배출한 베냐민지파의 그 자존심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나는 베냐민지파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나는 나라를 구한 지파출신이라는 의미가 숨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페르시아의 속국이었을 때 하만이라는 사람의 모략으로 온 이스라엘민족이 살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에스더라는 베냐민지파 출신의 페르시아 왕후 덕분에 이스라엘이 살아났고, 그 후 부림절이라는 절기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아뭏튼 바울이 나는 베냐민지파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나는 이스라엘의 초대왕을 낸 왕족이라는 자부심과,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구원한 지파라는 자부심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바리새파사람이다. 여러분, 유대인 사이에 바리새파란 의미는 대단한 의미입니다. 종교적 공동체였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종교적 자부심은 바리새파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본래 바리새파란 구별된 자라는 의미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떠나있을 때, 그것을 지킴으로써 민족적 위상을 회복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파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바리새파라는 말 속에는 종교적으로 흠이 없다, 종교적으로 구별될만큼 존경을 받을만 하다라는 의미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예수에게서는 외식주의라고 비판을 종종 받았습니다만, 유대사회에서 바리새파는 자타가 공인하는 종교인,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속에는 없지만, 그 밖에도 바울에게는 육신으로는 대단히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학문적으로 가말리엘로부터 높은 학문을 연구한 사람이요, 신분상으로는 당시의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사회적으로나 율법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그는 어떠한 수치심의 유형에 예민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요,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나 타인에게나 작은 허물이나 흐트러짐을 견딜 수 없어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일종의 완벽주의적 수치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정말로 완벽을 추구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말했듯이 율법으로는 흠이 없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살기 위해 율법적으로 흠이 있는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믿는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 만남이 그의 자손심을 건드린 것입니다. 자신만이 완전하다고 생각한 그가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일종의 완벽주의적 수치심을 느낀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 흠이 없는 자라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완전해 보이지도 않았고 사회적으로 변변치 못한 사람들로 구성된 정말로 별 볼 일없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스스로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율법을 참으로 완성시킨 완성자요, 그를 믿고 따르는 것은 율법을 마찬가지로 완성하는 것이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심한 수치심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 귀속적 수치심으로 똘똘 뭉칭 사람이었던 같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귀속적 수치심으로 뭉쳐있었는지, 바리새파의 입장만이 절대이고, 그 나머지는 이단이요 죽여야만 하는 대상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테판이 돌아맞아 죽을 때, 그 옆에 있으면서 그의 죽음을 당연시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예수를 믿는 자를 죽일 음모를 하게 되었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다메섹으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기독교에 대한 편견으로 싸여진 귀속적 수치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완벽주의적 수치심이든, 혹은 귀속적 수치심이든 그것이 지나치면, 그것은 자칫하면 자신에 대해서는 자살을, 타인에 대해서는 살기를 들어낼 수 있는 위험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의 수치심에 어떠한 변화가 생겼습니까? 완벽주의적 수치심으로 무장했던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귀속적 수치심에 뭉쳐있던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신만이 최고라고 생각하여 2등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던 바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독교에 대한 편견 속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던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새로운 수치심의 개념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것은 완벽주의적 수치심에서 건전한 수치심으로, 귀속적 수치심에서 창조적인 수치심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자를 차별하던 귀속적 수치심이 아주 뽀얗게 사라지고, 오히려 차별받던 그리스도인들과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예수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달으면서 새로운 형태의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7절) 주님 앞에서 자신의 초라함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발견한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얼마나 비천한지, 그리고 예수가 얼마나 큰 분이신지 뼈져리게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또 스스로 결단합니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함으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8절)
그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지 경험하면서 높으신 예수 앞에서 건전한 수치심을 느낀 것입니다. 계속하여 그는 이렇게 결단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11-12절)
결국 바울은 예수를 믿고 나서 그의 완벽주의적 수치심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창조적 수치심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자신이 과거에 갖고 있던 완벽주의적 지식들이 이제 배설물같이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를 모르는 것이 가장 부끄러운 창조적 수치심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마지 경주자처럼 달릴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앞에서 부르시는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노라”(빌4:12)

4.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회는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입니다. 완전을 요구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기준에 못미칠 때, 나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수치심으로 자학하기도 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결국은 나를 죽이고, 남을 해하려고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수치심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것입니다. 잘못된 수치심에 대하여 우리는 아니오라고 용기있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표는 바울이 말한 대로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할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보다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 앞에서 얼굴을 붉혀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안에서 나 자신의 신앙이 부족함을 느끼고 부끄러워할 때, 우리의 신앙은 그 순간 한 단계 더 성숙한 단계로 도약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200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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