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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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떤 경제신문에 난 기사를 보았습니다. 어린이경제교육을 전담하는 기구에서 워크샵을 했다고 합니다. 초등학생 7-8명을 한 조로 해서 선생님들이 상황을 주면 그걸 해결하는 연극을 꾸미는 것입니다. 그 상황은, 아버지가 직장이 없는 상태에서 할아버지 도움을 받고 사는 데, 아이들이 값비싼 무엇을 사달라고 조르자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당장 직장을 구하지 않으면 생활비를 끊겠다고 했답니다. 그런 상황에서 문제를 어떻게 타개해 나가는지 연극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조에서 기막힌 대안을 보여주었답니다. 그것은 할아버지를 위장 살인해서 유산을 물려받고 또 보험금도 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태연하게 연출해 내었고, 다른 조의 아이들은 그 조의 연극이 기발하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최고의 연극으로 선정했답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세계 경제는 소비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래서 사회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소비를 부추기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 돈을 손에 쥐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남이 가진 것을 가지지 않으면 안되고 남보다 많이 가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위장 살인을 통해 보험금을 타서 자기들이 갖고 싶은 것을 가진다는 얘기에 이르면 참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현대는 절제보다는 욕망의 실현에 비중을 두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서 돈을 벌게 하는 체제입니다. 미국에는 보보라는 그룹이 생겼다고 합니다. 지식인 그룹인데, 보헤미안과 부르주아를 합한 것이랍니다. 전에는 지식인들이 보헤미안적인 세계에 살고 돈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는데, 이제는 돈도 같이 손에 쥔 사람이 진정으로 능력 있는 지식인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뛰어나면 돈도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현대 문명은 돈버는 것을 일종의 미덕으로 평가합니다.

1. 그러나 우리는 오늘 성서에서 위로와 안식을 얻어 볼까요? 오늘 성서에서는 예수께서 ‘들에 핀 꽃, 하늘을 나는 새가 솔로몬의 옷보다 아름답고 넉넉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냥 삽니다. 수고하고 길쌈하지 않고 거두어 모아들이지 않아도 아름답고 넉넉하게 살아갑니다. 뭔가를 이루려고 애쓰고 노심초사하고 안달하는 뭇 인생들을 측은히 여긴 예수께서 주변 생명체를 돌아보며 하신 말씀입니다.
들꽃과 새들은 그냥 살아가는 일에 충실합니다. 가장 최소한의 조건에서 생명을 피워냅니다. 물을 빨아들이고 햇볕을 받아 푸른 잎을 내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그리곤 사라집니다. 태어나 성장하고 하늘을 날며 살다가 새끼를 기르고 숲 속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특별히 무슨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특별히 무슨 재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냥 그렇게 삽니다. 뭔가를 많이 가진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 데, 하늘 아래서 자신의 존재를 꾸밈없이 드러내고 자기 존재에 충실합니다. 특별히 잘 사는 것이 없어도 그냥 삽니다.
어떻게 보면 답답하고 무의미하고 무료한 삶이지요. 매우 수동적인 삶의 자세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얼 굉장히 이룬 솔로몬,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시절의 주인공 솔로몬보다, 들꽃의 모습을 더욱 높이 샀습니다. 솔로몬은 대단히 화려한 생활을 했겠지요. 옷도 대단히 잘 입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최고의 명품을 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특별한 장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사는데 필요한 단촐한 몸을 가진 들풀이 솔로몬의 영화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과장법을 쓴 것일까요?
현대는 너무 잘 사는 것에 신경을 쓰고, 좀더 재밌게 삶을 누리는 데 신경을 씁니다. 그것을 문명의 진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냥 사는 것의 조촐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조촐함의 충만함을 잃어버렸습니다. 화려하게 있어야지 그냥 있을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 있음 그 자체에 충실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담담하게 그냥 있는 것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너무 삶의 의미를 따지다 보니까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은 삶은 삶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일을 벌이고 너무 많은 것을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대는 생산을 위해 노동력을 총동원하는 체제입니다. 뭐라도 하면서 살도록 합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기여를 했지만, 반면에 그냥 있는 것을 불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있게 하는 기본적인 생명 그 자체 곧 숨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예수님은 말합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잘 먹고 잘 입느라고 ‘목숨’ 자체는 뒤로 물러났습니다. 숨은 언제나 쉬는 것이니까 당연하게 전제된 것이어서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들풀은 숨만 쉬고 사는 것입니다. 숨만 잘 쉬어도 잘 살 수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런 얘기가 아주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을 이 문명을 바꾸는 얘기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몰두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일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쩌면 이방인들의 문명 속에서 그들을 따라가며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생명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 곧 숨쉬고 먹는 일을 예사롭지 않게 생각하고, 거기서 충만함을 찾을 수 있다면 가장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가장 조촐한 데서 충만함을 찾으니, 그 이외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더해 주신 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은총을 듬뿍 누려서 풍성한 삶을 사는 비결은 더 많이 갖는데 있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아는 데 있을 것입니다.

2. 물론 의미 있게 살고, 잘 살면 좋겠지요. 또 되도록 재미있게 살면 좋을 것입니다. 어쩌면 성경은 그처럼 의미 있는 삶을 잘 살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 주는 책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바울이 말할 때, 생명이란 단순히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처럼 살게 된 것을 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보란듯이 잘 살 수 없는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살다 보면 마지못해 살아야 되는 경우도 있고, 무의미하고 지루한 삶이 계속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 이상 의미 있고 재미있는 삶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은 정말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좌절과 분노의 항쟁을 그린 만화가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화인데, 며칠 전에 그 책을 보게 되었는데 표지에 그런 글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들의 피의 항쟁과 끊임없는 죽음, 그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그들의 삶은 계속된다. 그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세 아들을 모두 잃고 울부짖는 어머니들, 형제와 친구를 잃고 뼈에 사무치는 분노 그러나 어떻게 바꿀 수 없는 현실. 아들이 모두 죽었는데도 그 다음 날 또 일어나 밥을 먹고 하루의 삶이 계속되지 않습니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삶이지만 삶은 계속됩니다. 사람은 꼭 사는 의미가 있어야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때로는 의미 없이 그냥 살 줄도 알아야 되는 모양입니다.
뜻하지 않은 불행을 당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주위에서 죽어 가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교통사고로 죽는 친구들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상가에 가 보면 예외 없이 젊은 부인이 있고 또 아이들이 상주로 손님을 맞이합니다. 어떤 친구는 빚을 잔뜩 안겨 놓고 갑니다. 그 부인의 인생은 이제 고난만 남았습니다. 신혼 초에 가졌을 꿈 곧 알뜰살뜰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도 그 부인은 담담히 손님을 맞이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죽음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나 태연하게 상주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것. 아마 그것은 가장 원초적이고 끈질긴 생명력의 준엄함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큰 의미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인데도 그래도 살다 보면 웃을 일이 전혀 없지 않습니다.
그냥 사는 것의 거룩함이 있습니다. 슬픔과 절망을 안고, 그래도 그 운명을 수용하며 그냥 살 줄 아는 이들이 지니는 준엄함이 있습니다. 땅바닥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들이 지니는 엄숙함입니다. ‘그래도 살으라’고 하는 하늘의 명령에 복종하는 이들의 삶의 깊이입니다. 그들은 죽지 못해, 마지못해 사는 것 같아도 하늘의 무조건적인 명령에 따라 삶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기반은 생각보다 거룩한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삶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삶은 삶 이상이고 삶은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삶에 성공해서 부와 명예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안았던 하나님의 사람 욥이 마지막으로 깨달아야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냥 사는 생명의 거룩함입니다. 폭풍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이 한 얘기는 무엇입니까? 욥의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엉뚱한 애기를 합니다. 그것은 들에 뛰노는 염소와 아무도 보지 않는 대지에 내리는 비, 그리고 알을 깨고 나와 하늘을 나는 새의 얘기입니다. 그냥 사는 생명의 얘기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들풀과 하늘의 새를 가리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성공하고 존경받으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았던 욥이,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후 깨달아야 하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의 의미입니다. 무조건 사는 것의 의미입니다. 있음의 은총입니다. 그냥 있음의 충만함입니다. 소유에서 존재로 가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그것을 깨달으면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의미 있고 즐거운 삶을 사시길 기원합니다. 많은 일을 하셔서 사회에 기여하고 많은 유익을 미칠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문명의 병을 말해 주고있습니다. 그냥 사는 것, 담담하게 살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어쩌면 거기서 가장 진솔한 자아를 만나고 가장 큰 은총을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들에게 때로 죽지 못해 살고 마지못해 사는 순간들이 생겨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계속되어지는 삶의 행진 속에서 우리는 우리 생각보다 깊은 하나님의 생각을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같이 하시길 빕니다.


그냥 사는 생명에 대하여

마태복음 6: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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