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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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본문: 마태 6:25-34, 로마 1:16-17 

설교: 이계준 목사 (2020.1.26.)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하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100가지는 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가운데서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추려본다면 생각하는 존재, 일하는 존재, 희망하는 존재, 믿는 존재 등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모든 정의들은 우리의 존재와 삶에 대해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함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일상과 떼놓을 수 없는 것이 믿는 존재일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믿음직하고 사회가 믿음직스러우며 하느님과 믿음의 관계가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설교제목인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는 말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로 옮겨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믿음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정신적으로 암담하고 도덕적으로 혼탁한 정황에서 우리의 믿음을 성찰하므로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새로 살아가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믿어 오늘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첫째로 의인의 믿음은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신뢰라는 말은 사도신경이나 교리적 선언 같은 교리나 신조를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것들이 가리키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며 우리 인간의 생명과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절대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신앙의 모델을 아브라함에게서 찾는데 그는 고향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갈 곳을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19세기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죄렌 키르케고르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비유하여 말하기를 믿음이란 그 깊이가 100km가 넘는 바다 위에 떠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망망한 바다에 떠 있을 때 긴장한 나머지 엎치락뒤치락하면 아래로 가라앉지만 긴장을 풀고 몸을 바다에 온전히 맡기면 뜨게 된다는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먹고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 공중의 새는 하는 일 없어도 하느님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들의 백합화도 하는 일이 없으나 솔로몬의 옷차림보다 더 아름답다. 그러니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느님께서 너희의 요구를 모두 아시니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6:25-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의 축이 흔들리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도가 약한 탓도 있겠지만 우리의 현실 자체가 총체적으로 흔들리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날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을 보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높은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교양과 질서의식을 갖추었고 이웃과의 관계가 믿음직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법과 제도가 합리적이고 공평한 신뢰사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시민이나 이웃과의 관계나 사회법과 제도가 신뢰사회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취약합니다. 우리도 한 때 선진국 문턱에 도달하였다는 환상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끝 모르는 물질주의가 계층 간의 불신사회를 초래하였고 더욱이 사회주의 이념의 팽대로 인해 분열사회로 추락하면서 그 꿈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개인과 가정, 학교와 직장, 정치인과 국민 간의 싸움터가 되었는데 불신과 분열이란 암적 요소를 제거하지 않고는 개인과 가정도, 교회와 나라도 파멸의 불랙홀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의인이란 두 발은 세상을 밟고 머리는 하늘을 향하면서 두 팔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실로 암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섭리를 굳게 믿고 나아갈 때 신실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간구와 수고를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제국 치하에서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고백한 놀라운 신앙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과 곤고, 박해와 굶주림, 위협과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과 삶, 천사들과 권세자들, 현재 일과 장래 일, 높음과 깊음,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8:35, 38-39)

 

저는 북한 김일성 치하에서 5년 동안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찬송가를 수도 없이 불렀습니다. 절망과 죽음의 수용소에서 어떤 희망도 없이 친구들과 함께 목청껏 부른 찬송이 하느님께 상달되었고 제에게 최고의 선물 자유를 주신 것을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의인의 믿음은 성실한 신앙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배우자나 가족과 이웃들에게 성실한 것과 같이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그분께 충실과 충성 그리고 전념을 다 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성실의 반대는 두 가지인데 배신(infidelity)과 우상숭배(idolatry)입니다. 배신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성실하지 못한 것인데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배신할 때 주로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또 하나의 불성실은 우상숭배인데 하느님께 궁극적 신뢰와 충성을 다하지 않고 권력과 물질, 지식과 명예, 가족과 욕망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맨 처음에 너희는 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므로 우상숭배를 금하였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두 계명을 주셨는데 하느님과 이웃 사랑하는 것 밖에 절대 관심을 갖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본 것이라고 이해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난맥상인데 그 중심에는 절대 권력이란 우상이 있습니다. 고려대 명예교수인 서지문 씨는 한 칼럼에서 이 우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한국의 좌파 정권은 소련의 볼세비키 혁명, 히틀러의 제3공화국, 북한의 정권과 너무나 흡사하다.’

 

기억하시겠지만 3년 전 박 대통령 탄핵 때 사회주의 정권이 등장하면 적화통일로 갈 가능성이 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현 정권은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독재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민의 인권과 자유, 언론과 신앙을 스스럼없이 통제하고 억압하며 목적달성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세대는 현대에 등장한 온갖 독재와 이에 대한 반응의 역사적 교훈을 체험했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치 히틀러에 대해 독일교회와 바티칸은 침묵을 지킬 때 본회퍼 목사는 이에 항거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한국개신교는 저항의 중심이 되어 엄혹한 고초를 겪은 반면에 가톨릭교회는 침묵하였습니다. 독재자 김일성의 전쟁도발에 대한 한국교회의 저항은 자유 대한민국을 살리는데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군사독재에 대해 가톨릭교회와 일부 개신교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교회들은 묵과하였습니다. 현 독재에 관한 한 군사독재에 항거하던 교회와 지도자들은 지지하거나 묵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독재는 우상이고 우상숭배는 하느님에 대한 배신이므로 저항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신앙이 아닙니다.

 

근자에 많은 지성인들이 독재와 여야 정치권에 실망한 나머지 국민의 각성과 4월 총선에 한 가닥 희망을 거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이 각성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하면 우리의 주체성을 세계만방에 과시하는 동시에 선진국에 진입할 자격과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반대로 사회주의 정권이 승리하면 우리는 결국 북한처럼 독재자와 그 집단을 위한 노예의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 확실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실한 신앙인으로 의미 있게 생존하려면 오늘 우리에게 군림하는 우상타파에 전력투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우리 중심에 하느님의 임재를 확인하는 동시에 우리의 절대가치인 자유와 행복을 지키고 자손만대에 전하기 위해 사랑과 정의의 횃불을 높이 들고 우상과 싸워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성실한 믿음은 곧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과 모든 피조물 그리고 생명의 모태인 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상타파와 자유와 정의 위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 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더하여 주실 것을 믿고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의인의 신앙은 인생 무대를 보는 독특한 방식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보돼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는 동시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미국 신학자 M. 보그는 인생을 보는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인생 무대가 적대적이고 위협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든지, 언젠가 태양이 꺼지면서 폭발하면 지구와 태양계가 파멸된다든지, 혹은 인생에는 가난과 질병, 사고와 폭력 등 생존의 위협이 가득 찼다는 것 등입니다. 종교적으로는 불신앙과 범죄는 하느님의 심판에 따라 지옥에 간다는 피해망상증 같은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생 무대는 인간의 존재의미나 목적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유행하는 인간관으로서 우주는 물질과 에너지의 소용돌이치는 역학의 장이지만 인간에게 적대적이지도 우호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주는 우아하고 장대하게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무관심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살아가려면 안전장치가 필요하므로 심미적 감정으로 아름다움을 즐기고 세상을 돌보며 자기 자신과 가족을 챙기는 일에 일차적 가치를 둔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방식은 위의 두 가지 입장과는 달리 인생 무대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를 양육하는 모태로써 삼라만상을 존재하게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경의와 아름다움으로 충만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인생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 찼다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렇듯 인생의 무대를 은총의 시각에서 보면 살아가는 모습 곧 우리의 응답이 달라지면서 신뢰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적대적이거나 무관심에서 비롯된 근심 걱정과 자기집착에서 벗어나고 안전장치로 자기를 보호하려는 아집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히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오고 현재 주어진 일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으며 지금 여기서 삶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궁극적으로 자기 인생을 공동체의 최고선을 위해 바치게 됩니다. 해마다 성탄 때면 나타나는 이름 없는 기부자처럼 말입니다.

 

영어 속담에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 (먹구름에도 뒤쪽에는 은빛이 빛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행할 때 공중에 뜬 비행기창문에서 내려다보면 온통 먹구름으로 뒤 덥혀 땅이 안보이나 위를 쳐다보면 무한대의 우주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경함합니다. 이것은 인생이란 시각에 따라 그 의미와 가치를 달리한다는 것을 일러줍니다.

 

비록 세상은 인생 무대를 비관적이거나 무미건조하게 치부할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낙관적 신앙의 소유자임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낙관주의는 결코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적인 낙관주의하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따라 현실을 타개하며 새 역사를 개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믿음을 지녔다고 해서 고난과 고통, 위협과 위기가 닥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처럼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은 마음으로 충성을 다 할 때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11:6)이 되는 동시에 하느님의 현존가운데 보람찬 인생을 하늘의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실로 생명과 삶의 총체적 위기 가운데 의인의 믿음을 지키므로 하느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빛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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