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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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동물이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말이 아니라도 우리 인간은 행복을 찾아 일생을 소비하는 존재라고 해서 좋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아마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모두 있는 그런 상태나 조건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고플 때 먹을 것이 있고 치울 때 입을 옷이 있고 행복한 가정이 있고 든든한 직장이 있고 등등 사람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골고루 갇추어져 있을 때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것을 보장하는 나라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는 것은 모든 필요조건을 다 가추었다고 할지라도 행복하지 않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혹시 필요한 것을 소유하면 행복하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구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이 없는 경우도 있고 물건은 있으나 필요한 사람이 많아서 서로 경쟁해야하고 때로는 싸워야 하기도 합니다. 행복을 추구하면서 행복하지 않는 방법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불행하게 됩니다. 마치 평화를 위하여 싸우므로 서로 파괴와 살인을 일삼아 결국 평화는 어디론가 살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행복이란 자기의 능력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 로빈손 크르소처럼 고도에서 자기 혼자 있다면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겠지만 우리는 가족과 이웃과 함께 살기 때문에 행복은 언제나 상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좋은 말은 해도 상대가 비난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자기는 건강하고 제구실을 다하지만 가족들이 그렇지 못하면 불행하기 마련입니다. 행복이란 자기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다 행복을 찾아다니고 또한 그 길은 다양합니다. 서양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고 받는 인금으로 만족하고 더 원하면 더 열심히 일하거나 월급 많은 곳으로 직장을 옮기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도 인간이니까 돈과 지식과 명예가 높은 차원에 이루는 것을 마다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비교적 자기가 쌓아 올린 노력과 대가에 대해서 순응하고 만족하는데 익숙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실이나 우리 한국인들의 행복관은 서양 사람들과 많이 다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우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기를 거부하거나 반항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 해 봅니다. 내 직업이 무엇이던지, 집이 몇 평이던지, 사회적 지위가 무엇이던지 관계없이 나의 오늘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기 보다는 불만을 가질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가 어떤 부족을 느낄 때 더 많은 것을 창조하려는 의욕도 생기고 발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수하고 성실한 자세로 자기 삶과 일에 충실 하는 것과 불만과 불평 속에서 같은 일을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 결과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보면 모두 다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가정파탄과 실직으로 노숙자가 된 사람들이나,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임금을 더 많이 받고 주 5일 근무제로 휴시시간을 연장하고 경영참여까지 하겠다는 노동자들이나, 카드 빚 갚으려고 강도행각을 벌이는 사람들이나, 고객의 예금을 빼 가지고 달아나는 은행의 좀도둑들이나, 정치한답시고 수십, 수 백 억원의 정치자금을 집어먹는 큰 도둑놈들 그리고 국민을 먹여 살리겠다고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자기 배만 터지도록 불리고 나오는 대도에 이르기 까지 모두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행복이라는 것이 자기의 현실에 만족하거나 그것을 성실한 노력을 통해서 성취하려고 하지 아니하고 힘으로, 권모술수로, 속임으로 자기의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인격이나 명예는 물론 신앙마저 아랑 것 하지 않고 물질주의적 행복의 노예가 된 것을 보면 우리 사회의 미래가 얼마나 암담한지 실로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왜곡되고 변질된 행복의 추구가 우리 사회에 하층에서 상층까지 전염병처럼 번져 있고 꼭 같은 행태가 역겹게도 날마다 반복되고 있어서 순수한 국민들을 도덕적 불감증 환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행복을 바르게 추구하는 사람이나 잘못되게 추구하는 사람이나 모두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2. 사람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동물적인 행복 곧 먹는 것이나 충동을 만족시킨다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 추구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기의 인격, 가정, 직업, 신앙을 통해 인간의 참되고 성숙한 모습을 조각하는 일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참 사람이 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에리히 프롬이 표현과 같이 인간의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행복이란 물질지상주의로, 더욱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하여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떤 것입니까?
이런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려 말 학자이자 훌륭한 신하인 이조년(李兆年)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명한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를 지은 시인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시를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소년시절에 그는 형 억년과 한강가를 걸어가다가 우연히 길가에서 금덩어리를 주웠습니다. 두 형제는 금덩어리 하나씩을 나누어 가지고 기쁨에 들떠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 조년이 금덩어리를 강물 속에 던져버렸습니다. 깜짝 놀란 형이 묻자 조년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형님, 금덩어리를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금을 현님과 나누어 갖고 난 후 줄곧 욕심이 솟구쳐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형님이 없었더라면 내가 몽땅 가질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형님의 것을 뺏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끼지 뭡니까. 그래서 나는 황금이 요물임을 깨닫고 버린 것입니다.”(최인호,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에서)
후세 사람들은 형제들이 금을 던졌던 양천나루를 금덩어리를 던진 여울이라는 뜻으로 투금탄(投金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행복을 물질에서 추구하지 아니하고 청빈에서 찾으려는 생각이 강하였습니다. 고려조의 마지막 보루였던 최영 장군도 자기 자녀들에게 이런 가훈을 남겼다고 합니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이 말은 불로소득이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재물은 생각 있는 사람이 취할 것이 못되며 그런 것을 소유할 때는 오히려 재난이 따른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중세기 역사에서 보면 교회가 세속적으로 타락할 때에 수도원 운동이 발전합니다. 그런데 그 수도생활 특징의 3대 요소는 ‘청빈, 정결, 순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 프랜시스는 청빈의 성인으로 유명한데 그는 말하기를 “돌덩어리보다 돈이나 황금을 더 쓸모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고 경고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성 프랜시스는 불행한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오히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행복을 향유한 사람이라고 말해서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교조 존 웨슬리는 자랄 때 목회하는 아버지의 수입이 적고 가족은 많아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에게는 항상 빵이 모자랐던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그의 키가 5척 단신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일생을 보면 검소와 청빈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에 세상에 남기고 간 것은 낡은 성경책과 해진 가운과 은수저 한 벌 그리고 돈 몇 쉴링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난과 청빈 그리고 그의 악처마저 그를 불행하게 만들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도 행복을 만끽하고 살았기 때문에 초인적인 일을 해냈고 위대한 전도자로 발자취를 남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3. 오늘의 본문인 마태복은 22:15-21에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트집잡아 없애기 위하여 올가미를 씌웁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예수께서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하면 그를 로마의 앞잡이라고 비난할 것이고 세금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면 로마 정부에 저항하라는 뜻으로 보고 고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들의 간악한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지 않으시고 질문하는 자들에게 돈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에게는 돈이 한 닢도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요즘 우리는 돈이 없으면 카드라도 갖고 다니는데 예수께서는 돈도 없으시고 카드도 없으셨습니다. 실상 그는 가난하였고 또한 청빈하였습니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새들도 긷드릴 곳이 있지만 자기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선교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으시기도 하고 그들의 집에서 주무시기도 하셨으므로 돈이나 집이 필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가정도 없고 자식도 없으니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제자들을 선교하러 보내면서도 말씀하시기를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마태 10:9)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께서 추구하는 행복의 철학은 오늘 우리 사회의 왜곡되고 부패한 물질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처럼 부양가족이 없는 전도자나 사제라고 해서 모두 청빈한 생활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세기에는 많은 신부와 감독과 추기경들이 재물을 탐내어 매관매직하는 일이 많아서 M. 루터의 개혁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근자에 꽃동내 사건은 청빈을 추구하기 위해 결혼도 하지 않는 신부들도 물질주의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사실을 보여 준 것 같습니다. 그런 이중적인 생활을 할 바에야 오히려 가까운 교회에서 최근에 일어난 사건 모양으로 목사가 교회 재정 100억을 꿀꺽하고 용퇴하는 편이 낳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큰 돈이 있다면 나도 한번 욕심을 부려볼지 모르겠습니다.

4.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인으로는 참으로 처신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물질주의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세상에서 잘 적응하고 앞서 가면서 선두주자가 되려면 세속주의의 부정한 물에 손발을 담그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청염 결백한 삶 속에서 차원 높은 행복을 추구하다 보면 현실적으로 상대적인 빈곤과 검은 유혹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골고다의 길이기도 하고 삶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행복을 얻으려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왕좌왕하는 우리에게 행복의 열쇠를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5:3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공동번역에 보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복’이나 ‘행복’이란 말의 근원인 히브리어는 ‘ashre'인데 그 뜻은 ’how happy'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행복을 말할 때 육신, 마음, 정신 등 총체적인 행복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마음이 가난해야 행복하다는 것은 청빈이 행복 전체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즉 마음을 비우면 삶 전체가 행복해 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복은 불가(佛家)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법정 스님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옛말에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건주면 남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우쳐 주고 있다.” 법정은 행복의 구체적인 조건도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에 있다. 나는 향기로운 차 한 장을 통해서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내 삶의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다. 산길을 지나다가 무심히 피어 있는 한 송이 제비꽃 앞에서도 얼마든지 나는 행복할 수 있다. 그 꽃을 통해서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다.”(“사에는 꽃이 피네”에서)
지금 우리는 편향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는 풍조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우리의 욕망과 탐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왜곡된 행복을 참 행복인양 쫓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개인적, 사회적 비극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말하기를 “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존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복을 원하고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행복을 완성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말도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행복 자체가 없거나 완전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는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욕망과 탐욕을 채우려고 행복을 추구하면 그것은 가까이 오기보다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 행복의 성격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물질적으로나 세속적인 방법으로는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뇌물과 정치자금으로 자주 법정에 드나드는 정치인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 지혜를 구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보기 좋은 듯싶습니다. 그 아버지는 신학자요 목사요 정치인이었고 어머니는 너무나 유명한 여성 지도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묘가 그의 욕망과 탐욕을 해결해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먼저 마음이 가난해져야 행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부모님의 묘소를 찾을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겸손히 서서 깊은 참회와 함께 지혜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성패는 행복과 불행에 달려 있다고 해서 과언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열심을 다하여 행복을 추구하십시오. 그러나 말로는 행복을 찾는다고 하면서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고 동분서주하면 절대로 행복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불행만 늘어나고 실망만 커지는 것입니다. 행복은 욕망과는 정 반대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불행한 인생을 살아갔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행복의 조건이 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가 날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세속적인 욕망을 모두 버려서 마음의 여백이 생기면 하느님은 우리의 빈 마음속에 행복을 가득 안고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잔은 행복으로 넘쳐흐를 것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윈하십니까? 그러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십시오.



`가장 행복한 사람 `

이계준목사

마태 5:3, 22: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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