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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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독교 종교를 정의할 때 우리는 믿음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교를 가리켜서 사람들이 “道德의 종교”(혹은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인도에서 탄생한 힌두교나 불교를 우리는 “瞑想의 종교” 혹은 “修道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와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이슬람교를 가리켜서 사람들은 역시 기독교와 같이 “믿음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여러 종교에 속한 사람들의 좋은 속성을 말할 때 기독교에서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유교에서는 윤리적 덕을 많이 쌓은 사람을 君子라고 합니다. 인도계통의 종교인들 가운데 명상이나 수도를 많이 한 사람들을 가리켜 道人 혹은 修道師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독교에서는 믿음이 없거나 적은 사람을 불신자라하고, 유교에서는 덕스럽게 살지 못하는 사람을 小人(輩)라고 하고, 인도계통의 종교에서는 수도를 하지 못한 사람을 俗人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그렇게 흔히 사용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쉽게 답하기 어렵습니다. 수많은 성직자들이 주일마다 강단에서 믿음을 소리쳐 외치고 또 신도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아멘.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반복하고 있지만 실은 그 믿음이 어떤 것이고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전철이나 역 같은데서 사람들이 “예수 믿고 천당에 가시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때 믿는다는 것은 천당에 가기 위한 수단처럼 들립니다. 또 교회에서 저 분은 믿음이 좋다고 말하면 그는 성경을 많이 읽어서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다거나 혹은 기도를 많이 한다든지 또는 주일을 잘 지키고 교회에서 직분도 맡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믿음이 가진 외적 현상들을 말하는 것이지 믿음 자체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원리랄까 뿌리가 되는 믿음의 기원은 어디에 있으며 그 내용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오늘날 왜 우리는 믿음을 중요시하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 믿음의 뿌리와 그 내용을 바로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세계사에서 인간을 삶을 규정하는 두 개의 커다란 흐름들, 즉 믿음을 삶의 원리라는 희브리 사람들의 전통과 지식을 삶의 원리로 보는 그리스 사람들의 전통을 비교해서 파악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두 개의 전통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여 인간의 사상과 삶을 지배해왔고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오늘날도 희브리 전통 즉 신구약성서에 나타나 있는 삶의 준거로서 “믿음”을 기초로 살아가는 인간들과 그리스 전통 즉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서 제시된 “이성”, 즉 지식(과학과 기술)을 기초로 살아가는 인간들로 뚜렷하게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로마라고 하는 정치적 군사적 힘을 삶의 준거로 생각하는 집단들도 존재한다). 좀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인류의 역사에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信仰의 傳統”과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는 “理性의 傳統”, 즉 “지식의 전통”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확연히 구별되고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우선 이스라엘인들의 삶의 원리가 되는 믿음의 전통부터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성서 창세기에 보면 믿음의 전통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성서에 보면 믿음이란 신뢰와 복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일흔 다섯 늙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 하란을 떠나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늙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일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일입니다. 요즘 식으로 생각해 봐도 은퇴할 나이에 안정된 고향의 터전과 직업을 버리고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에 복종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이란 철저한 신뢰이고 복종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곧 신뢰와 복종을 삶의 중심에 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서 출발하는 신뢰와 복종의 삶은 모험을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은 신뢰와 복종에 기초한 모험의 삶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창세기 18장에 보면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떠난 지 25년이 지난해에 늙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아들을 약속합니다. 그 후손이 번성하여 바닷가에 모래알 같이 많게 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 사라는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100세나 되었고 자기도 늙어 경수까지 끊어진 처지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그 약속을 듣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아마 아브라함도 반신반의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백살이 되는 해에 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약속을 믿고 기다린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정적 사건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요구에 복종하는데서 일어납니다. 창세기 22장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100세 얻은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참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이삭을 통해서 그 후손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번성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이제 와서 어린 그를 불살라 바치라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아브라함은 믿고 복종합니다.
그는 아들에게 번제에 쓸 장작을 지우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한참 가다가 “불과 장작은 여기 있지만 번제로 바칠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이삭이 묻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그것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신다”고 거침없이 대답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속으로는 하나님은 어이없는 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하나님은 정말 믿을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전처럼 단순한 신뢰와 복종에서 “설마 하나님이 약속의 씨로 준 자식을 끝내 죽이지는 않겠지. 하나님이 그렇게 무자비한 분은 아니겠지.” 깊은 불신 가운데서도 깊은 확신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라고 아들에게 답하게 한 것입니다. 순종하는 수동적 믿음에서 “그럴 수야 없지”하는 능동적 믿음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라는 자기확신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이것 곧 자기확신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이 자기 뜻과 일치하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는 이성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을 신뢰가운데 믿음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가운데 불을 피워놓고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은 양을 준비시켜서 그것을 제물로 바치게 합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준비하신다. 하나님이 해결하신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의 역사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모세에게서도 일어났습니다. 그는 노예가 되었던 희브리 민중을 이끌고 막강한 이집트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출애굽해서 해방시켰습니다. 그 후계자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강력한 정착민들을 추방하고 땅을 차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왕국을 세운 이후 예언자들은 폭정과 착취에 맞서서 정의를 위해서 싸울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출애굽해방운동이나 토지점령운동 그리고 정의를 위한 모든 투쟁들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이야기나 예언자들의 이야기들은 이성적으로, 지식으로 생각한다면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와 같은 해방이나 자유운동,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운동들의 깊은 뿌리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전통에서 볼 때 오늘날 사회가 이렇게 어지럽고 살기 힘들고 젊은이들에게 희망이 없는 것은 모두 믿음의 원리에서 살려고 하지 않고 이성과 지식 그것도 도구적 이성으로만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인들의 삶의 전통 그것도 도구적 이성을 통해서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서 많은 편리한 물건들을 생산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더 발전하고 더 생산하고 있습니다. 독일 신학자 가운데 로데라는 사람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하나님 나라는 바로 과학의 발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믿음의 뿌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의 삶의 원리인 이성에서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최첨단의 시대, 즉 디지털 시대에 들어선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예수의 시험받은 기사에 나오는 돌로 떡을 만드는 시대의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믿음이 지배하지 않고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다른 것은 그만 두고 젊은이들의 교육문제만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교육 특히 우리 나라의 교육은 철두철미 이성의 원리 그것도 “도구적 이성”의 발전만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적 이성이나 세계의 잘못을 시정하려는 비판적 이성 등 여러 종류의 이성이 존재하지만 오늘날의 교육은 물건을 만들고 생산해서 돈을 버는 것만을 추구하는 “도구적 이성”만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물질의 생산만이 최고의 것이고 그 생산능력에 따라서 인간이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청소년들은 유치원으로부터 대학을 나올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생산과 관련된 도구적 이성의 발달만 강요당합니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미적 이성이나 인간 사이의 신뢰와 화합을 추구하는 신앙 같은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미적 이성을 추구할 수 잇는 감수성을 타고난 아이들은 왕따를 당하거나 학습지진아로 전락합니다. 한마디로 우리 청소년들이 어려서부터 학원에서 학원으로 죽을 고생을 하면서 공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적 삶의 전통 즉 도구적 이성만을 추구하는 세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물질의 가공과 생산을 통해서 목표하는 것 즉 돈을 벌기 위한 것으로 귀결됩니다. 성서적으로 말하면 믿음의 하나님과 같이 할 수 없는 맘몬을 섬기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이러한 도구적 이성이 가져온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저는 다시 믿음의 전통으로 다시 돌아오고자 합니다. 믿음이 가진 세계사적 중요성은 그만 두고 우리 개인들의 삶의 영역에서 믿음의 중요성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목회를 하면서 두 종류의 가정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는 믿음을 원리로 사는 가정과 다른 하나는 이성(혹은 업적)을 중심으로 사는 가정이었습니다.
믿음을 원리로 하는 가정의 특징은 부모와 자녀간에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가정은 자식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신뢰합니다. 따라서 자녀의 자질과 능력에 맞는 교육을 시켜주고 지원해줍니다. 능력이 없으면 없는 대로 IQ가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도록 가르치고 도와줍니다. 되배쟁이를 하겠다면 그것을 도와주고 벽돌공이 되겠다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합니다.
그러나 이성을 원리로 한 가정은 다릅니다. 부모와 자녀간에 신뢰가 없습니다. 부모들은 대체로 자기 자녀들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려고 합니다. 학자가 될 수 없는 아이를 인정하지 않고 학자가 되라고 합니다. 판검사가 되라고 합니다. 아니 요새 인기가 많은 의사가 되라고 합니다. 자녀가 가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가정교사도 대 보고, 학원에도 보냅니다. 아이는 밤낮으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공부라는 것을 해보지만 성적은 올라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자녀들에 대한 신뢰 그들에 대한 능력을 믿지 않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부모와 자식간의 신뢰가 깨어지면 그 결과는 파탄으로 나타납니다. 가출이나 자살과 같은 극단적 결과를 낳지 않는다 해도 신뢰관계가 깨어진 가정은 결과적으로 여러 가지로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문지상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예만 들자면 젊은이들이 수천 만원의 신용카드 빚을 지고 신용(믿음) 불량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도하게 이성과 지식에 기초한 업적주의(공로주의)가 가져온 오늘날 세계의 비극적 결과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믿음이 가진 의미를 사랑과 희망이라는 차원과 관련해서 살펴봄으로써 제 말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 으뜸은 사랑입니다.”
우선 믿음과 소망의 관계에서부터 생각해 봅시다. 희망의 뿌리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희망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식에 대한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그에게 희망을 걸 수 있습니까? 직원에 대한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그에게 희망을 걸 수 있습니까? 믿을 수 없는 자식이지만 믿어줄 때 그는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직원이지만 그를 믿어줄 때 그는 희망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자녀나 직원 아니 친구를 믿지 못하면 희망은 사라지고 인간관계도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믿음과 사랑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사랑 역시 믿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안가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믿을 수 없는 동료를 사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희망을 둘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이라는 것이 사랑과 희망의 원천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을 믿어줌으로써 그에게는 미래가 생겨나고, 이 미래를 통해서 사랑의 관계가 성립됩니다. 믿어주고 사랑할 때 미래의 희망이 싹이 터고 자라납니다. 자식을 믿어주고 사랑하지 않게 되면 그에게 미래의 희망은 없어집니다. 자식을 믿고 사랑하고 그에게 희망을 걸면 그 자식은 거기에 상응하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없는 사랑도, 사랑 없는 희망도, 희망 없는 믿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어야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편 25:8-10
고전 13:13
손규태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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