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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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한 세상 이기기 2006. 9. 17.
빌립보 2:12-13, 야고보 2:24-26

1.
프랑스의 세계적인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트 카뮤는 1957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축구에서 배웠다.”
그러나 그가 축구에서 배운 도덕과 의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호색한이자 바람둥이었다고 합니다. 카뮤의 두 번째 아내인 프랑신은 남편의 복잡한 여자 관계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면서 남편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도 하였으나 신경쇠약에 걸려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카뮤는 자기의 부도덕한 행각이 아내에 미칠 영향에 대해 잘 알면서도 반성하고 새 삶을 살기는커녕 소설에 써먹기까지 하였다는 것입니다. “전락”이란 소설은 물에 뛰어든 여자를 구하지 못한 어떤 변호사가 자책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물에 뛰어든 여자의 모델이 그의 아내 프랑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책이 나온 후 프랑신은 카뮤에게 “이 책은 내게 빚을 지고 있군요”라고 말했더니 카뮤는 고개를 끄덕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축구에서 도덕과 의무를 배웠다고 하였으나 그의 삶은 도덕과 의무와는 전혀 무관한 동시에 정반대인 부조리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카뮤가 부조리 문학의 대명사인 “이방인”이란 소설을 썼습니다. 저도 1950년도에 신존주의 문학이 한창 유행일 때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읽은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데 최근에 한 일간신문 칼럼을 통해 다시 회상하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해변에서 시비 끝에 아랍인을 권총으로 쏴 죽입니다. 죽인 동기는 아랍인이 꺼낸 칼이 태양의 반사광선으로 자기 눈을 부시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뫼르소는 법정에서 태양 때문에 죽였다고 변명하였으나 부조리한 해명으로 치부되어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형 집행 전날 뫼르소는 신부의 방문을 거절합니다. 하지만 그는 감옥 창살 너머에서 풍겨오는 별, 흙, 소금 냄새를 만으면서 대우주의 품 속에 안기는 만족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카뮤에 대해 길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지난 주 부시 대통령이 “이방인”을 읽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이르켰고 그의 행동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일간지에 의하면 뉴욕 타임스의 한 칼럼니스트는 말하기를 “우리의 자랑스러운 반(反) 지성적 대통령 손에 어떻게 그 소설이 들어갔을까” 라며 비아냥거렸습니다. 부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데 반해서 아랍인을 죽인 뫼르소는 확고한 무신론자입니다. 따라서 부시와 “이방인”이란 소설은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는 계속해서 “부시는 이방인을 죽인 모르소에게서 동일감을 느끼지 않았을까”라면서 “부시가 ‘이방인’을 읽은 것이야말로 카뮤가 말한 부조리”라고 신랄하게 조롱했다는 것입니다.
이 글은 부시의 부조리를 한국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였을 때 김훈의 소설인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전의를 불태웠던 것도 부조리한 사건이라고 합니다. “칼의 노래”는 전쟁터에 던져진 이순신 장군 개인의 고뇌를 비장하게 표현한 소설이라고 합니다. 한 철학자는 말하기를 작가 김훈은 정치적으로 참여정부에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에 “노 대통령이 ‘칼의 노래’를 탐독한 것은 한편의 코메디”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대로 지금 노 대통령은 소설을 읽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시를 능가하는 부조리한 말과 행동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자주’와 ‘주권’을 내세워 전시 작전통제권을 미국으로부터 환수하겠다면서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역사적 지배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주’와 ‘주권’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은 미사일 위협과 핵 공갈을 통해 스스로 국제 질서에서 ‘이방인’을 자처하고 있는데 노 대통령은 북한의 대변인처럼 그것을 ‘자위 수단’이니 ‘인공위성 발사’라며 국제적으로 고립된 이방인의 편을 들고 있습니다. 대통령 개인의 실존적 부조리가 나라와 국민 전체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시가 지난 여름에 ‘이방인’을 탐독한 것은 지난 14일 정상 회담의 파트너인 노무현 대통령을 심층 연구하기 위한 사전 탐색일 것이라는 말로 그 신문의 칼럼을 맺습니다.

2.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소설처럼 부조리한 이야기가 우리의 직접적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 세계의 경찰 국가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이 이락을 침공한 행동에서 시작하여 지금 우리가 몸소 느끼고 피해를 입고 있는 국내 정치, 경제, 사회란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부조리한 현상이 정치인만이 저지르고 사회 일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그리고 우리 가정과 우리 자신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벌써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으로 지적되어 온 사교육비를 생각하면 한 가정의 수입의 반 이상을 투자해도 모자르고 기러기 아빠의 문제로 가정의 경제파탄 뿐만 아니라 가정파괴와 남편의 자살까지 온갖 비극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 결국 우리들의 부조리한 판단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과학자인 황우석 교수팀의 사건이 정치적인 배경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가장 확실하고 성실해야 할 학문연구가 그렇게 허위와 위선으로 포장되어 학문에 대한 모독과 국가적 위신을 실추시킨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우리 국민의 부조리한 행태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요즘 농촌에 가면 농부들의 생활이 도시 생활 부럽지 않게 냉장고, TV, 자가용 등 평의 도구를 모두 갇추고 있고 일년에 한 두 번 국내외 관광도 즐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발전이나 저축한 돈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농협에서 농사자금을 융자하여 농업에는 투자하지 아니하고 개인의 유흥이나 평의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농협의 빚은 선거할 때마다 정치적으로 탕감받으니까 융자하지 않는 사람만 손해본다는 의식이 팽배하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논촌에서 오래 목회한 친구는 농촌의 겉은 화려한데 내용은 비었다면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근자에 강원도에 있는 어떤 큰 교회 목사가 도박에 빠져 교회를 사퇴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목사는 개인 돈을 물론이고 교회의 재정을 비롯해서 친구와 교인들로부터 평생 갚을 수 없는 돈을 빌려 태백시에 있는 카지노에서 모두 날렸다는 것입니다. 이 케이스는 목사가 도박에 미친 환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도박사가 유한한 물질의 도박사로 변질한 부조리의 병리적 현상입니다.
여러분, ‘바다 이야기’하면 요즘 한물 갔다고 느껴지지만 근자에 일어난 사회적, 개인적 부조리의 대명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바다 이야기나 기타 사행심을 조장하는 게임에 몰입한 일은 없습니까? 불로소득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정상모리배들과 그들의 하수인들의 농간으로 인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도박공화국의 비참한 국민이 되고 개인의 심적 타격과 가정 파탄을 자초했습니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것이 도박이고 반드시 딴다고 생각하여 시작한 것이 반드시 떼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곧 도박입니다. 그 결말을 빤히 보면서도 개입하니까 참으로 부조리하고 병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는 이 사회의 부조리 현상에 대해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닐지 몰라도 분명히 간접적인 피해자들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왜 이런 부조리가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를 파괴하는 것입니까? 그 근본 원인은 우리의 말과 행동, 생각과 현실, 도덕과 사회 간의 이가 맞지 않을 때 일어나는 부조리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조리의 중심에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자기 중심적 충동이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건전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책임적 인간이 되는 길은 이 욕망과 충동을 통제하고 순화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3.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서두에서 그리스도의 겸손한 본성에 대한 감동적인 시를 읊은 다음 오늘의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따른는 자들의 실천적인 생활에 관해 빌립보 교우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권면은 빌립보 교우들이 자기와 함께 있을 때와 꼭 같이 자기가 없을 때도 자기 구원을 이루기 위해 제 발로 서는 책임적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물론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그 구원을 실현하도록 우리를 도우시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일에 있어서 불평과 시비를 하지 말고 왜곡되고 굴절된 세대에서 흠 없고 순결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때 그들이 하느님께 불평과 반역을 일삼은 사실을 회상하는 동시에 혼탁한 이방지대에 사는 빌립보인들의 현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듯 왜곡되고 굴절된 우리 인간의 마음과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의 참 빛을 던져주는 별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권면에서 우리는 두 가지 핵심적인 본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15절에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느님의 흠 없고 순결한 자녀가 되라‘는 것과 둘째는 16절에 그렇게 되기 위해서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으십시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왜곡와 부조리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인 동시에 우리가 창조하며 살고 있는 현실도 왜곡과 부조리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의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려면 생명의 말씀을 확고하게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서두에 부조리한 세상에 관해서 길게 말씀드렸읍니다만 이 생명의 말씀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본문 바로 위에 있는 빌립보서 2:6-11에 있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명의 말씀이란 곧 하느님의 말씀인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것으로써 그는 하느님 나라 선포와 그 실현을 위해 죽기까지 자기 사명에 충실한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말씀이란 부조리한 삶과 세계를 전혀 새로운 삶과 새로운 세계로 재창조하기 위해 자기 신명을 다 바친 한 인간의 모델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으로 오신 예수가 부조리한 자기 자신과 세상을 이긴 비결인 것입니다.

4.
이 생명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카뮤는 축구에서 인생의 도덕과 의무를 배웠다고 하였으나 실상 그에게는 도덕이나 의무가 없었고 그의 부조리한 인간성이 제2차 대전 전후의 인간 및 사회의 부조리를 소재로 한 소설을 써서 실존주의 문학에 크게 공헌하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생명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부조리가 만든 도덕적 피해는 보상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 크리스천들이 모든 도덕과 의무를 성경에서 배웠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도덕과 의무란 것은 행방불명이 되고 가족과 동료인간 그리고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피해만 남아 있다면 우리는 신앙인으로써 아니 인간으로써 자격상실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야고보서 본문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는 말씀에 사로잡혀서 한 평생 말과 행동을 접근시키기 위해 힘 써 왔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이 그것을 달성했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고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날마다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위선적이고 이중인격인 사람입니까? 저는 실상 늘 자책하면서 겨우 겨우 망신을 모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저는 근자에 가까운 주변에서 심각한 부조리 현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동시에 이런 현상이 사회 뿐만 아니라 개인과 가정 전체에 만연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과 생활 형태를 절대적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생활을 이해하려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반성이란 전혀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훌륭한 크리스천 가정 배경을 갖고 자타가 인정하는 지성인들이기 때문에 더욱 실망스럽고 앞으로 우리 가정과 사회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주변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런 일이 없으면 참으로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그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그대로 묵인하고 시간 지나가기만 기다릴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대책을 간구할 것입니까?
우리가 부조리한 세대에 자기가 부조리한 존재란 의식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도 편리하고 안락한 방법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품위와 도독을 지닌 인간으로, 더욱이 크리스천으로 그런 왜곡되고 병적인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인생의 낭비인 동시에 인간의 명단에서 자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생명의 말씀으로 죽음과 부조리를 극복한 사람의 이야기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 사람은 채규철 선생인데 저는 그를 한벗회를 통해 알게 되었고 제 동생과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합니다. 그는 농촌운동에 꿈을 가지고 여기서 농대를 졸업한 다음 수년 동안 유달영 선생이 주관하던 농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그 후 그는 덴마크로 유학하고 돌아와서 대학에서 가르치며 의료보험이 없던 1960년 대에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창설하고 장기려 박사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을 시작했습니다.
1968년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그는 몸의 45%가 3도 화상을 입고 죽음과 삷의 기로에서 싸우다가 장기려 박사와 가족 및 친구들의 희생적 노력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눈 하나를 잃었고 미남의 얼굴은 수십번의 성형수술에도 불구하고 흉하게 일그러지고 손발도 오그라졌습니다. 그의 얼굴은 나병환자철럼 보입니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은 놀라고 도망가거나 혹 음식점이나 다방에 들어가면 돈 100원을 주면서 나가라고 거지 취급을 날마다 당하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사랑하는 부인이 아들 둘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는 슬픔도 겪었습니다.
최근 그가 자서전 “소나기 30분”이란 책을 펴냈고 저에게 주어서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가 당한 정신적, 육체적 아픔과 고통, 갈등과 부조리를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험심단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자기의 본래의 모습과 화상 후의 모습, 자기의 정체성과 현실의 냉대 사이에서 말할 수 없는 괴리와 부조리 현상을 절감하며 70평생 살아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실망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강연, 글, 사회복지운동, 환경운동을 하면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봉사생활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채 선생이 개인적, 사회적 부조리를 극복하고 승리한 이 놀라운 정신과 힘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그는 고백하기를 ‘사람은 사명을 다 할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신앙의 확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화신인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한 인간의 생명과 그 주변이 온통 망가지고 뒤집어지고 갈등과 부조리의 늪 속에 빠진 비참한 운명이었지만 그는 하느님이 자기에게 주신 생명의 말씀 곧 한국사회의 발전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라는 신념과 신앙이 오늘 70 고개를 넘도록 고난의 삶을 창조적인 삶으로 바꾸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를 20여년 간 사귀어 왔지만 그에게서는 어떤 굴절이나 갈등이나 부조리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에게 왜 갈등과 부조리가 없고 날마다 당하는 비인격적 모독에 대해 왜 분노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생명의 말씀이 더 크고 더 힘이 있기 때문에 날마다 이기는 보람된 삶이 가능하지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은 이토록 놀라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의 부조리한 환경과 우리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려고 하십니까? 생명의 말씀을 확실하게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모든 갈등과 부조리를 극복하고 인격의 통일, 친교의 조화, 인류평화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조리한 세상을 이기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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