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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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이와 같이 하여라

 

본문: 시편 82:1-8; 누가복음 10:25-37

설교: 홍정호 목사 (2019.7.14. 성령강림 후 제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이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권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하였다. 너는 이 세삼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 후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본문은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두 차례에 걸친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먼저,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영어 번역을 보니 이렇습니다.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그냥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물은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해야 영생을 유업으로받을 수 있겠습니까?”하는 물음입니다. 예수님보다 분명 율법을 더 많이, 자세히 알고 있을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이 질문을 하는 의도를 독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함입니다. 질문을 하는 이 율법교사의 태도도 주목할 만합니다. 누가는 이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고 전합니다.

 

중동지역에 오래 살면서 그 지역 문화를 깊이 연구한 신약성서학자 케네스 베일리(Kenneth E. Bailey)의 설명에 따르면, 선생인 이 율법교사가 학생처럼 일어나서 질문을 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중동의 전통문화에서 선생은 앉고 학생은 선생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일어서서 이야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고 곤경에 빠뜨리려는 목적에서, 그가 마치 겸손한 학생인 양 일어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질문의 내용도 이상합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유업으로 얻겠습니까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교사는 유업이라는 것이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유업은 무엇을 해서 얻는 게 아니라, 그 가족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별다른 노력 없이 그냥 받는 것입니다. 그 집안에서 태어나거나, 양자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상속자로 지정되어 얻게 되는 것, 말하자면 은혜로 거저 얻게 되는 것이 유업이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 영생을 유업으로 얻겠습니까?” 하는 질문은, 슬쩍 함정을 파놓고 질문을 해서 말꼬투리 하나가 잡히면 이를 빌미로 예수님을 이단자로, 율법을 부정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의도가 담긴 질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이 질문에 직답을 하시는 대신 그가 잘 아는 율법을 상기시키시면서 그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Do this and you will live.)”하셨습니다.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영생을 유업으로 얻을 것이라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율법학자가 파놓은 함정을 피해 그가 할 일을 스스로 하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첫 번째 대화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2.

 

그런데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질문이 많고, 아는 것은 그것보다 더 많은 율법학자다운 태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예수님께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두 번째 대화의 시작이고,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입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율법학자의 두 번째 질문입니다. 느닷없는 질문인 것 같지만, 율법학자의 입장에서는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입니다. 잠시 그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래 잘 알고 있는 말씀이지. 멋지고 좋은 말씀이야. 감동적이기까지 하지. 그러면 이 율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켜야하지? 누구에게, 얼마나, 어떻게 적용할 수 있지? 이 율법을 두고 벌어지는 상이한 해석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조율될 수 있지? 똑같은 말씀을 두고 서로 자기가 옳다고 다투고 순교까지 하겠다며 극성을 부리니 말이지. , 그러려면 우선 율법의 적용 범위를 살펴봐야겠군. 누구에게 적용되고 적용되지 않는지, 누가 이 율법이 적용되는 우리의 이웃인지를 우선 살펴봐야겠군. 그래야 그다음 질문으로 발전될 수 있으니까!”

 

어떻습니까? 일단 훌륭한 학자입니다. 공부는 답을 얻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이전에 가졌던 질문을 더 성숙한 질문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질문을 멈추고 답을 정하고 그대로 지키는 대신, 질문을 계속 발전시켜 나간다는 점에서 일면 좋은 학자의 태도를 보입니다. 학자라면 이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제자라면 이런 스승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학자라는 이가 질문을 멈추고 자기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은 자신의 지적 게으름을 폭로하는 데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의 이런 학자다운진지함을 외면하면서 그의 태도를 한 마디로 일축해 버립니다. 그가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시원한 말이죠? 피식 웃음이 납니다. 똑똑하고 고매한 학자의 화려한 말 속에 감춰진 속내를 슬쩍 드러내 보이는 해학이 여기에 희미하게 담겨 있다고 봅니다. 복음서의 시선은 이처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습니다. 아무튼 이 율법학자는 예수님에게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3.

 

율법학자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서로 다른 계급에 있는 세 명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성전과 율법이 중심이 되었던 유대사회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섬기는 세 계급에 속한 이들입니다. 첫째는 제사장이고, 둘째는 레위인이고, 셋째는 평신도였습니다. 이들 세 계급의 사람들은 성전과 율법 중심의 세계에서 그 역할이 서로 달랐지만 유대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한 몸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등장인물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세습집단이었고, 부와 명예, 권력을 쥔 사회의 특권적 엘리트 계층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임무는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고, 예배를 통해 이스라엘의 율법 정신을 지키고 후대에 계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사람들과 직접 만날 일이 별로 없습니다. 영화 <기생충> 보신 분들은 공감하겠습니다만,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나는 냄새가 익숙하지 않은 그런 사람이죠. 그런데 그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성스러운직무를 마치고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옷이 벗겨진 채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거의 죽게 된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옷이 벗겨진 채 쓰러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옷으로, 언어로도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단서는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그 시대 중동지역의 다양한 민족 공동체들은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1세기 유대교 학자들은 히브리어를 할 수 있었지만, 농부들은 아람어로 말했습니다. 페니키아 해안 주변 사람들은 페니키아어를 썼고, 갈리리 바다 주변에서는 시리아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스 도시 사람들은 그리스어로 대화했고, 남쪽 부족들은 아랍어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정부의 관원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라틴어를 사용했습니다(베일리,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452). 이처럼 다양한 언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장소와 계급, 문화를 그 자체로 대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쓰러진 사람이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 알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만약 이 제사장이 이 강도 만난 자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면, 그는 제사장으로서 율법에 따라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었을 겁니다.

 

만약 그가 이집트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시리아인이나 페니키아인이라면, 이 제사장에게는 그를 구제할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이었다면, 그 제사장을 책임을 지고 그에게 다가가 도움을 주어야 하고, 그것이 그의 책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을 들을 수 없으니 그가 누구인지를 구분할 길이 막혔습니다. 또 하나,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이 제사장의 행동을 가로막았습니다. 만약 피해자가 죽었다면, 정결법에 따라 부정한 자와 접촉한 것이 되어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별도의 정결례를 거쳐야 하고, 그 기간 동안에는 십일조를 거두어들일 수 없고, 십일조를 거두어들이지 못하면 십일조를 통한 구제의 길도 막혀서, 결국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곡식과 재물도 분배될 수 없습니다. 이밖에도 그가 이 쓰러진 사람을 접촉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제사장의 입장에서는 돕기 싫어서가 아니라, 공적 직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그 쓰러진 자와 접촉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그는 이 강도 만나 옷이 벗겨진 채 쓰러진 사람을 그냥 지나쳐 갈 길을 갔습니다.

 

두 번째 등장인물은 레위인입니다. 레위인은 제사장의 보조자 역할을 한 이들입니다. 제사장이 공적 임무를 수행할 때 혼자 다니지 않고, 직무를 보조하는 이들과 함께 다녔다는 점을 생각할 때 레위인은 제사장과 동행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쩌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제사장이 간 길을 따라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제사장이 지나간 길에 그대로 누워 있는 강도 만난 자를 만났습니다. 순간 그의 머리도 복잡해졌습니다. ‘가만있어보자, 제사장님이 방금 이 길을 지나가셨는데, 이 사람이 여기에 그대로 있다? 그러면 그냥 지나치셨다는 얘긴데, 신실하고 박식하신 제사장님이 그냥 지나가셨다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아닌가? 제사장님도 그냥 가셨는데 내가 감히 나서야 하나? 에라, 모르겠다. 제사장님이 갔던 대로 가야겠다그러면서 그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주교가 그냥 지나간 일을 일반 사제가 나설 수 없습니다. 담임목사가 모른 척 넘어간 일을 전도사가 나서서 뒤집기는 쉽지 않습니다.

 

마지막 인물은 누구입니까? 제사장이 등장하고, 레위인이 등장했으니, 이번에는 순서상 유대인 평신도가 등장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제사장과 레위인과 평신도가 유기적으로 한 몸을 구성하는 것이 성전 율법 체제의 유대사회였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담임목사와 전도사가 그냥 지나간 길 끝에 신실한 평신도 한 명이 나와 그를 돕는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인물을 이 비유에 등장시키셨습니다. 바로 사마리아인입니다. ‘아니, ?’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어리둥절했을 겁니다. ‘아니, 웬 갑자기 사마리아인?’ 높은 분들이 모른 척 넘어간 일을 신실한 유대인 한 사람이 잘 실천을 했다고 말해도 충분할 텐데, 왜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등장하는 이야기 끝에 우리유대인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우리유대인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논쟁적인 사마리아인을 이 이야기에 끌어 오시는가?

 

이 사마리아인은 앞서간 두 사람과 달리 다친 사람을 측은히 여깁니다. 앞선 두 사람도 측은히 여겼겠지요. 그들이 악마가 아니라, 종교지도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앞선 제사장과 레위인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보다 율법이 앞서고, 명분이 앞서고, 실리가 앞섰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생명을 살리는 길을 택하지 못하고, 제 갈 길을 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온갖 논리를 동원해 억누르지 않고, 그 마음 그대로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는 쓰러진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상처를 싸맨 다음, 자기의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면서 두 데나리온, 그러니까 노동자의 이틀 치 임금에 해당하는 돈을 선불로 지급하면서 이 사람을 잘 돌봐 주시고, 부족하면 오는 길에 갚겠다고 말하며 길을 나섰습니다. 고급 승용차에서 내린 좋은 향기 풍기는 제사장이 아니라, 털털거리는 차에서 내린 불법 체류자가, 곧 설지도 모르는 자기 차에 다친 사람을 태우고 가서, 이틀 일해서 번 돈 20만원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잘 돌봐달라고 말하고 나오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이야기 속 사마리아인을 우리 시대로 불러낸다면 누가 될까요? 불법 체류 난민이 될까요? 일본사람이 될까요? 북한사람이 될까요? 조선족 동포가 될까요? 아니면, 좌파, 동성애자, 이슬람교 신자가 될까요? 누가 되든지 간에 우리 한국 개신교인들이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 위험해서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바로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겁니다. 주류 집단 안에서 소외된 채 원망과 분노의 대상이 된 이들, 당신들 때문에 우리의 안전하고 편안한 삶이 위협당한다며 손가락질을 당하는 집단, 복음서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분명 그런 이들의 은유입니다.

 

이 비유를 해석한 미국인 베일리 교수는, 이 이야기에서 강도 만난 이를, 등에 활을 맞은 카우보이로, 그리고 그를 싸매고 고쳐 돌본 이를 인디언 원주민으로 비유합니다. 등에 활 맞은 카우보이를 누가 돌봤는가? 주교도 사제, 목사도 전도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실한 평신도도 아니고, 그들 아메리카의 청교도 개신교인들이 하나 같이 적대시한 인디언이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베일리는 묻습니다. “이 카우보이를 도운 인디언은, 여관이 있는 카우보이 마을에 가서 환대를 받았을까?” 그는 설령 이 원주민이 카우보이를 도와주었더라도, 마을 사람들이 이 원주민을 죽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이를 유대인 마을로 데려다주고 그 마을을 무사히 빠져나왔을까요? 사마리아인의 복식과 언어를 사용하는 그를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다른 이들은 적대시하고 붙잡아, 마치 간첩신고를 하듯이 신고해서 팔아넘겨 버리지는 않았을까요? 결말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이 비유 끝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4.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렇게 묻는 이 율법학자의 질문은, 제가 오래 생각해 보아도, 정당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답하시는 대신 이 질문을 하는 이가 행해야 할 바를 비유로 알려 주시며, 되려 그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너는 이 세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이고, 내 적이 누구인지를 정의하고, 그 경계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자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율법 전문가에게 넌지시 일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경계를 넘는 사랑입니다. 경계를 넘는 사랑이라니, 낭만적으로 들리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많은 위험이 따르는 일입니다. 경계를 넘는 예수님의 사랑은, 위험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이들의 높은 편견(아마도 도덕)의 벽에 부딪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사랑이며, 당장에 환영받고 칭찬받기 어려운 사랑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도덕과 씨름하고, 사회적 편견에 도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러한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는 율법학자의 질문은, 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그러면, 너는 누구의 이웃이 되었느냐?” 하고 질문으로 바뀝니다. “그러면, 지금 너는, 누구의 이웃이 되고 있느냐?” 이것이 예수님이 율법학자들에게,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 하시는 질문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사변적인 신학과 거기에 토대를 둔 도덕의 담장 안에서 계승되는 게 아니라, 율법의 본뜻을 실천하는 삶의 자리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을 주님은 이 비유를 듣는 이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사랑은 우리가 멸시하는 그들, ‘사마리아인을 통한 사랑의 실천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주님은 비유를 통해 일러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하는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는 것이 많고,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도움의 손길이 있었고, 그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셨기 때문에 앎과 경험의 축적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우리의 앎과 경험은 복음의 빛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성이 이 되려면, 그것은 자비와 사랑의 복음 안에서 거듭난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그 귀한 앎과 경험이 결국 자신을 옭아매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올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은총의 빛으로 거듭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하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 한 주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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