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오시는 주님, 맞이하는 우리

 

본문: 누가 1:46-56, 3:4-6

설교: 이계준 목사 (2019.12.22. 대림절 제4주)

 

1.

 

우리는 오늘 대림절 마지막 주일예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시다 시피 대림절은 세계 교회가 인류구원을 위해 오시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기쁨과 희망의 축제기간입니다. 비록 금년은 축제의 기분도 덜하고 상가의 흥행도 시답지 않으나 누구나 다소나마 축제의 분위기에 취하고 싶은 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2000년 전 최초의 대림절의 역사적 모습을 돌아보면 축제라는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비참하고 절망적인 현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당대의 패권국인 로마제국의 식민지로써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 착취의 대상이었고 소수의 사회 및 종교 계층을 제외하고는 모든 국민이 빈곤과 중노동 및 노예생활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 대중은 가난과 질병, 멸시와 천대의 나날을 보내면서 메시아의 구원을 학수고대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첫째 본문인 마리아 송가는 이렇듯 비참한 현실과 구원의 소망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권능으로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시며 주린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는 자비하시므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1:51-54)

그러면 메시아가 오신지 2000년이 지난 오늘 메시아의 대망을 축하하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현실을 어떻습니까?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이기에 짧게 말씀드리면 경제적 파탄과 정치적 난맥상, 동맹과의 단절과 안보의 포기와 함께 우리의 피땀으로 인류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쌓아올린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는 석양으로 기우러지고 북한의 핵위협과 사회주의독재체제의 출현으로 건국 이래 최대 위기 속에서 우리는 불안과 공포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2000년 전에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민족의 현실과 오늘 우리의 현실은 놀랍게도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위기의 외형은 다를지 몰라도 생명의 위협과 삶의 파탄이라는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으로써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 필요조건인 자유와 정의가 보장되어야 하는데 권력의 부도덕과 무능이 행복의 조건들을 도말하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는 메시아의 오심을 끊임없이 재현할 뿐만 아니라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실현하는데 갖은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새 역사창조에는 별 효과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지난 20세기 동안 인류는 막대한 지식과 기술을 개발하고 역사상 최고의 문화와 문명을 자랑하는 상아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대다수의 인류가 구원의 메시아를 목 놓아 기다리는 비극은 현재진행 중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반복은 어쩌면 우리가 마리아의 송가에 나타난 메시아의 권능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이란 하느님의 전지전능에 대한 절대 신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맹목적이고 수동적인 신뢰가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는 50%와 우리의 응답 50%가 융합될 때 비로써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린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교조 존 웨슬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존재를 깨닫고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2.

 

오늘의 둘째 본문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누가 3:4-6)

이 시적 표현은 예수보다 먼저 태어난 세례자 요한이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메시아가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룩할 수 있도록 길을 닦으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길이 없고 장애물 곧 죄악이 편만하니 인간을 노예화하고 비인간화하는 를 무력화시키고 주님의 구원이 성취되므로 인간이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정의가 무수하고 난해하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 현대 신학자들의 주장을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미국 신학자 R. 니버는 죄를 교만”pride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리스어 휴브리스”hubris로써 자기중심주의를 뜻하는 말입니다. 유한하고 나약한 인간이 부득이 자기 관심에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 신학자 P. 틸리히는 죄를 소외”(疎外)estrangement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분리란 뜻으로 인간이 자기가 관계 맺고 있는 하느님에게서 떠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신학자는 우리가 통상 죄라고 하는 모든 구체적인 언행들은 원죄인 교만과 소외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에 명성을 떨친 미국 신학자 M. 보그는 죄에 대한 시각을 달리합니다. 그는 죄를 도덕적 한계나 실존적 이탈이 아니라 사회적 속박이란 맥락에서 보았는데 성서에는 이를 상징하는 이미지들과 함께 치유와 해결책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눈이 멀었다면 보아야 하고 유배되었다면 다시 돌아가야 하고 묶였다면 해방되어야 하고 마음이 닫혀 있다면 열려야 하고 굶주리고 목마르면 음식으로 채워야 하고 길을 잃었으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현대 신학자들이 죄에 대해 해석을 달리하는 것은 신학이란 변화무상한 사회-역사적 현실에 대한 성서적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R. 니버와 P. 틸리히는 세계 제1, 2차 대전의 비극을 체험한 세대로써 인간의 원죄를 도덕적, 실존적 문제로 파악한 것입니다. 이와 반면에 M. 보그는 20세기 후반의 남미의 비참한 사회상과 월남전 등의 영향을 받아 죄의 문제를 사회학적 시각에서 본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해석의 다름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 산물인 것이므로 우리는 성서의 해석을 부분적이 아니라 종합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즉 우리 인간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이며 물질적이고 영적인 존재이라는 포괄적 이해처럼 우리의 죄에 대한 이해도 개인의 도덕적 교만과 실존적 소외와 함께 사회적 속박과 불의를 함께 묶어서 이해하는 것이 성서적 진실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3.

 

이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과제가 무엇인지 밝혀졌습니다. 하느님은 메시아를 대망하는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준비할 지혜와 능력을 주셨으므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어진 사명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구원은 우리의 개인적인 죄 곧 교만과 소외를 극복하는 동시에 사회적 불의와 억압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시는 주님의 길을 닦았을 때 주님께서 오셔서 구원의 드라마를 완성하신다는 말입니다. 오시는 주님의 도전과 그분을 맞이하는 우리의 응답이 마주쳐 울리는 소리가 곧 구원의 노래라고 하겠습니다.

사케오의 이야기는 이 진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세리 사캐오는 예수께서 지나가실 때 키가 작으므로 창피를 무릅쓰고 뽕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내려오라고 하시며 그의 집에 묵겠다고 하시자 기쁨으로 그를 맞이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캐오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자기가 강탈한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누가 19:1-10)고 하셨습니다. 사캐오는 주님께서 오시는 충분조건인 개인적인 관심과 사회적 책임을 모두 만족시킨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면 삶이란 순간마다 총체적 구원 곧 실존적 및 사회적 자유와 해방을 위한 싸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 영적 구원과 사회적 물적 구원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 자신을 돌아볼 때도 한평생 삶을 위협하는 불안과 공포, 무지와 빈곤, 불의와 독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했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덕적- 종교적인 존재로써 교만과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 하였습니다. 이 구원의 싸움은 아직 미완으로써 완전을 향해 진행 중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의 존재와 삶을 위협하고 속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통해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한평생 길을 닦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일대위기 앞에서 우리를 노예화하는 안팎의 모든 죄악을 물리치고 주님이 오실 길을 평탄하게 닦아야 할 것입니다. 그 때 메시아의 온전한 구원의 축복은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미치게 될 것입니다.

하버드의 신학자 H. 콕스는 말하기를 우리는 질문을 계속하는 한 완전한 인간으로 존속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여러분에 당부하고 싶은 것은 어떤 신앙이나 이념이나 가치관에도 붙잡히거나 고착되지 말고 나는 지금 주님의 길을 성실히 닦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하는 성숙한 크리스천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하며 자기성찰에 진실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