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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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심판 `

이계준 목사

성경말씀: 창세기 39장1-6절
로마 2장6-16절

우리는 야곱과 라헬 사이에서 태어난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애급에 노예로 팔려 갔으나 드디어 그 이방 나라의 재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주일학교 때부터 들어 왔습니다. 그는 형들의 증오와 질투로 애급 상인의 손을 통해 바로의 호위대장인 보디발의 노예가 되고 신용을 얻어 그 집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인 되었습니다. 요셉은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어서 그 많은 재물에 현혹되지 아니하고 보디발 부인의 유혹에 빠지지도 않아 종당에는 애급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노예의 신분으로 이방 나라에 온 이스라엘 사람이 재상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말씀대로 하느님께서 늘 그와 함께 계셨고 그가 형제들에게 고백한 바와 같이 하느님의 구원의 섭리가 있었기에 자신이 이 애급에 와서 재상이 된 것이고 또한 인간적으로 보면 그가 도덕적으로 매우 순수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지난 주 신문 만평을 보니까 청와대 어르신네가 신부님하고 부르니 스님이 엿보는 현장에서 신부님이 뺑소니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미 목사는 지나가고 거기에는 없었지만 지금 나도 부르면 도망 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문에 들으니 장대환 씨가 14번 째 만에 요청에 응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이 상황을 생각할 때 많은 분들이 겸손하게 고사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청문회에 자신이 없어서 포기한 분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온 타락한 사회적 현실을 되돌아보면 겸손한 편보다는 포기한 편이 절대 다수일 수밖에 없다는 가설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소위 사회 지도층에 속하는, 그리고 재상의 자격이 될만한 인물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위와 지식, 명예와 경륜, 인품과 권위를 모두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자의이건, 타의이건 간에 도덕성에 흠이 있고 양심이 멍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슬프고 부끄러운 우리의 현실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 이처럼 부도덕하고 타락하게 되었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멀게는 조선 시대의 과거급제로 권력과 부를 동시에 손에 넣던 옛 사회제도와, 가깝게는 금력과 권력 지향적인 1960년 대 이후에 전개된 산업화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됨의 기본인 도덕과 윤리 그리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실종이 오늘의 비극을 불러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암 세포처럼 이 사회 구석구석에 번져서 이 비극 속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의심하게 됩니다.
인간 개인이나 사회가 마땅히 지녀야 하는 도덕과 신에 대한 경외심을 저버린 다음에도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 속에 살아온 것이 우리 한국 사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희들이 읽은 로마서의 본문은 사도 바울이 하느님의 심판에 관하여 한 말씀인데 도덕적 그리고 신앙적 위기에 처한 우리에게 긴요한 말씀이라고 생각되어서 함께 나누려 합니다.

첫째로 하느님의 심판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합니다. 로마서 2장 6절 이하에 보면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기심에 사로 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갈 때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참으면서”란 말을 선한 일 앞에 붙인 것은 자기에게 닥쳐오는 불이익과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선행은 결코 손쉬운 것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일을 하는 까닭은 인간을 자기 자신의 거룩한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영혼을 불어넣어 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분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순수한 마음과 함께 변화무상하고 모든 것이 사멸하는 세상에서 영구적이고 무한한 가치를 추구하려는데 그 동기가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와 같이 선한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유한한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고 희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의 내용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육신의 수명이 다 소진된 다음 천당이라는 세계에 올라가서 하느님과 모든 선남선녀들과 함께 영생 복락을 누리는 것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영원한 삶이 없다는 말인가? 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만일 세상에도 영원한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주와 인류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우리의 믿음이 거짓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이란 사후만이 아니라 지금도 있어야 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참아가며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하느님과 동고동락하며 영원한 삶을 이미 맛보며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최근에 우리는 이 죄악의 세상에서 선한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어 실로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어떤 노인이 이북에서 단신으로 월남하여 고생하며 근검절약한 거금 200억 원을 사회에 환원한 소식에 접하였습니다. 이 노인은 기부행위를 결정한 순간부터 하느님이 선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 곧 영원한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삶의 소유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마음에 흐뭇함을 느꼈을 것이고 또한 선행의 동기도 자극 받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어떤 대학에서 자기네가 기부금을 받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노인의 사회적 공헌을 높여서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였습니다. 이 사실 또한 그 노인에게와 함께 그 대학의 영광이 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선한 일은 그 파급효과가 우리의 예상을 뛰어 넘어서 자기 자신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순수한 기쁨과 선한 동기를 부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함께 영원한 삶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면에 사도 바울은 “이기심에 사로 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른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기심이란 그것이 물질적이던지 또는 정신적이던지 간에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죄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거짓과 위선, 아첨과 비방, 권모술수와 살인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예의나 양심의 소리나 윤리적 원리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저버리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성숙한 인간이나 종교인이 가져야 할 “자기부정”이란 정신과 행태에 반대되는 것으로써 스스로 사람됨의 길을 포기하고 인간 공동체에 해로운 암적 요소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진리란 형이상학적, 추상적 진리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람됨의 길을 가는 것과 이웃과 함께 어울려 사는 삶의 향연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기주의적 인간이란 이웃과 사회 속에서 이웃을 자기 자신의 욕구만족을 위한 대상으로 삼고 동분서주하다 보면 스스로 고독한 섬에 갇히게 되고 불의한 치외법권 지대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예는 아니지만 마치 지금 서울의 강남 일부가 경제적으로, 교육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특정한 지대로 주목받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좀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이 곳은 한국인의 이기심이 극대화된 특정 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의 강남은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도 되지만 또한 분노의 대상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의 부패하고 부도덕한 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한다는 그러한 일반적인 인식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사회적 부정부패와는 전혀 관계없는 선한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특히 우리 교우들이 많이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적 비판에서 우리는 아무도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심이 천심이란 말과 같이 사람들의 비판을 하느님의 진노와 분노의 말씀으로 듣고 느끼고 참회할 줄 아는 양심과 신앙의 감수성을 지니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은 차별하지 않으시고 공평무사하게 심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2장 12절 이하에 “율법을 모르고 죄를 범한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이 망할 것이요 율법을 알고 죄를 범한 사람은 율법을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논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할례 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이나 관계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심판은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느 민족만의 신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신이요 온 인류의 창조자이고 섭리자이고 신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율법을 가지고 선민이라고 행세하면서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 그는 그 율법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도 율법은 없지만 하느님이 그 마음속에 새겨준 율법 곧 양심의 소리에 따라 실행하지 않으면 꼭 같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젓입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비를 내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모든 인류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사랑도 하시고 심판도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그냥 무심히 넘어갈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율법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는데 그대로 행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기 어렵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이 계명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얼마나 구체적으로 우리의 개인적 및 사회적 삶 속에 실현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뜻을 따를 수 있는 능력과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고 할 때 그 심판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하고 또한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책임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한국 기독교인 중에는 자기가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그의 심판에서 제외되는 특권을 가지고 있고 무조건 구원의 은총을 입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나는 철저한 믿음의 소유자로 성수주일하고 십일조 바치니까,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위해 충성과 생명까지 바치는 목자니까, 나는 하느님의 진리를 밝히기 위해 불철주야로 연구하는 신학자이니까 하느님의 최후 심판에서 면제될 것이 확실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타종교인이나 무신론자들은 심지어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까지 포함해서 하느님의 영원한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씀은 하느님의 심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기독교인이나 비 기독교인이나 모두 그들이 지켜야 할 도덕적이고 종교적 원칙에 따라 공평하게 집행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5장 31절에서 46절에 예수께서 최후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점은 심판의 기준이 사람들의 지식이나 지위, 민족이나 종교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적용된 심판의 기준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는 그 말씀입니다. 이 기준에 따라 양과 염소 가르듯이 의인과 죄인을 나눈 다음 의인들은 하느님 나라에, 죄인들은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특정한 민족이나 종교에 은총을 베푸시는 편파적인 독재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인위적 장벽을 초월하여 그들의 작은 선행을 보고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느님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시고 또한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사건은 언제 일어나는가? 시간의 문제입니다.
로마서 2장 1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드러날 것입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심판하실 그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일까요?
예수께서 이 마지막 심판에 관하여 복음서에서 말씀하시기를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그 때가 언제인지를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좀 주제 넘는 생각이지만 우리가 하느님만 아시는 최후의 날을 알 수 있는 길은 과연 없을까요?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그 날이 다가올 때까지 긴장과 초조 속에서 연명해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느님이 우리를 떠나 저 멀리 계시지 않으시고 우리와 가까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그의 현존을 믿는다면 그 날이란 문제는 깨끗이 해결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날이 오기 전에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나간 날들은 어제이고 살고 있는 날들은 오늘이고 앞으로 올 날들은 내일이라고 이름 부치고 편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만든 시간 개념이고 셈할 수 있는 시간 곧 크로노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영원무궁한 것으로 그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포함된 시간 곧 카이로스를 뜻합니다.
그 시간은 하느님의 창조와 섭리와 심판이 모두 어우러진 총체적인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 개념처럼 맨 처음 창조하시고 그 다음 섭리하시며 마지막에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의 역사(役事)가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카이로스적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시간은 영원한 현재라는 말로 표현해서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더불어 그의 영원한 시간 속에 산다는 것은 그의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적 능력과 사랑의 돌보심과 예리한 심판을 함께 우리 마음속에 경험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심판의 날을 뒤로 미를 필요도 없고 긴장된 상태로 기다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즉결심판처럼 날마다 순간마다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느님의 현존에서 그의 뜻을 묻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책임지므로 주님이 직접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봉사 단체에서 회원들이 크리스마스를 파티를 열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유흥 시간이 끝나고 만찬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때 회원 한 사람이 연장자에게 식사기도를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선생님, 아기 예수 탄생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하였습니다. 연장자는 대답하기를 “오늘이 수요일이지요? 나는 크리스마스 대신에 수요일을 축하하고 싶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 모두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고 연장자는 말하기를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면 오늘만 즐겁지만 오늘을 즐거워하고 소중히 여기면 날마다 크리스마스가 됩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우리의 삶이란 내일이나 미지의 시간이 아니라 오늘과 지금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행위가 오늘 그리고 지금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사랑을 보살피시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주신 계명과 양심에 따라서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하느님은 공평무사하셔서 모든 사람을 인종이나 종교의 다름을 떠나 선행과 악행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하느님의 최후 심판은 내일이나 영원한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현존을 의식하거나 못하거나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내려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영원한 현존 속에서 참 기쁨과 사랑과 평화를 누리는 우리 신앙인들은 지금 그의 심판대 앞에 서 있다는 엄숙한 마음가짐으로 날마다 순간마다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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