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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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자유`

이계준 목사

성경말씀:잠언 22:9-11,
요한1서 3:11-18

지난 주간에 박대선 감독님과 만나 점심을 함께 나누고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최근에 깐느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이창독 감독의 "오아시스"를 관람하려고 간 것입니다. 영화의 내용은 대략 이런 것입니다. 아직 보시지 않은 분들을 위해 요약합니다. 어떤 중증장애인과 전과 3범 사이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장애인인 젊은 여인은 오빠 내외와 함께 살다가 오빠 내외가 장애인 동생의 식사를 옆집에 맡기고 다른 곳으로 이사갑니다. 바닥에 기어다니기조차 어려운 장애인은 혼자 살아갑니다. 그리고 오빠 내외는 정부에서 지급하는 복지금을 가로채고 가끔 동생을 찾아옵니다.
전과 3범인 남자는 형의 자동차 사고로 사람이 죽자 자기가 형 대신 옥살이를 합니다. 카 쎈타를 경영하는 형이 있어야 가족들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옥한 그는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가정에서는 문제아로 천대꾸러기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과일 바구니를 사들고 자기형의 차 사고로 죽은 사람의 집에 가게 됩니다. 그는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거기서 장애인 연인이 있는 것을 보게되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착한 사람이라 그녀에게 동정심 같은 것을 느낀 듯 합니다. 이제 그는 혼자 있는 장애인 집을 찾아가게 되고 사랑의 관계가 싹트고 깊어지게 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을 통해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되고 잃어버린 사랑을 만끽합니다. 어느 날 그들의 사랑의 장면이 오빠 내외에게 발각되고 남자는 경찰소로 끌려가서 다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여인이 사랑을 빼앗기는데 항의하는 몸부림은 아무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었습니다. 사랑의 결핍증에 시달리다가 우연히 맺은 순수한 사랑이 주변 사람들과 법에 의해서 무참히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사람이 사랑할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장애인이건 또는 비장애인이건 간에, 우리 가족이건, 이웃이건 간에 하나의 인격이 인간으로써 이성을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을 누가 감히 박탈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의 자유는 하느님이 모든 인간에게 주신 기본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신약성서 본문인 요한 1서 3:11-18 말씀을 중심으로 사랑의 자유에 관한 명상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요한 1서 기자는 사랑을 말하면서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인 일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부모인 아담과 해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그 죄에 대한 책임을 하느님과 아내와 뱀에게 전가한 일이 그 다음 세대에 와서는 형이 동생을 죽이는 친족살해에 까지 발전합니다. 형제란 마땅히 서로 사랑하고 동거동락해야 할 핏줄인데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고사하고 동생이 사랑할 자유마저 빼앗아 버리고 생명까지 희생시키는 참극을 가져 왔습니다. 가인은 부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동생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아 버렸습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의 인간 창조의 섭리에 역행하는 행위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자신과 사회에서는 가인처럼 형제와 이웃의 사랑할 자유와 사랑 받을 자유를 박탈하거나 짓밟는 일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몇 일 전에 장애인들이 지하철에 장애인 시설이 부족하고 열악하다는 것에 항의하기 위하여 지하철 궤도에 누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애인 시설촉구 시민연대 대표로써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홀로된 두 노인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 자녀들이 반대하여 헤어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요즘 상영 중인 KBS 저녁 드라마 "당신 옆이 좋아"에서도 두 젊은이의 사랑이 부모의 반대로 파탄에 이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런 예는 흔해빠진 이야기에 속합니다. 제가 아는 교수 두 가정의 자녀들이 사랑하게 되었는데 부모의 관계가 좋지 않아 성사를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남자는 근 40세가 되어 결혼하였고 여자는 아직 미혼으로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가지 않아도 사랑의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허다하게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던지 간에 한 인간이 원초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사랑할 자유와 사랑 받을 자유를 받았고 그 자유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는 진리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간에, 형제간에, 친구간에 그리고 모든 보이고 보이지 않는 이웃 간에 사랑의 자유를 존중하지 못하는 결과 서로 비극의 쓴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버드대학에 "창조적 이타주의 연구소"를 설립한 사회학자 피타림 소로킨 교수는 사랑을 방해하는 4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두려움인데 두려워할 때 몸이 굳어지고 기능도 저하되며 자기 자신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숨는 것입니다. 둘째는 스트레스인데 이것을 받으면 고장난 기계처럼 되고 경련을 일으키며 중압감을 주는 작은 문제에는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면서 다른 것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스스로 무기력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 때 사람들은 무관심이란 누에고치 속으로 들어가거나 자기 우월감이 생길 때까지 고독하고 자폐적인 상태를 계속합니다. 넷째는 부족이타주의라는 것으로 우리의 가족주의와도 흡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보다는 부족이, 인류보다도 부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자유 박탈, 인종간의 갈등, 심지어는 종교전쟁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결정적 요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가 만일 소로킨이 말한 사랑을 저해하고 파괴하는 4가지 요인 중에 하나라도 갖고 있다면 하루 빨리 제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가족과 이웃의 사랑할 자유와 사랑 받을 자유를 짓밟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될 것이다.

2. 본문 14-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시체처럼 생명이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란 사랑에서 생기고 사랑을 주고받으며 삶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랑의 자유를 빼앗는다는 것은 인간 되는 길에서 벗어난 것이고 하느님의 진리 안에 있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참 생명을 알지도, 갖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한 거름 더 나아가서 사랑의 관계를 끊거나 파괴하는 자는 곧 살인자라고 낙인을 찍었습니다. 보이게, 보이지 않게 나와 당신, 당신과 그 사람의 인격적 사랑 관계를 끝는 사람은 이미 살인범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인범들을 저주하고 심판하여 형무소에 격리시키거나 죄질이 극심한 경우에는 사형에 처합니다. 이러한 보복적 정의는 어느 정도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해방 후 오늘까지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적법 절차를 밟는다고 하면서 무고한 인간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그 가정을 파괴한 무수한 살인자들이 아직도 호화롭게 살며 활개를 펴고 대낮에 활보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사회의 병들고 가난한 사람, 부모 없는 고아, 자녀 없는 노인, 그 밖에 소외된 이웃에 대해 사랑의 관심 없이 살아도 살인자라는 오명은 고사하고 심리적 죄책감마저도 느끼지 않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생명 곧 사랑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관심과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기 중심적 시각을 버리고 신앙 양심의 눈을 밝혀서 우리의 날마다 삶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루에 두 번 장례식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자기가 일하는 회사의 회장 장례식이었습니다. 그는 온갖 못된 짓을 다하여 거부가 되었지만 그 장례식은 매우 쓸쓸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부자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아름답고 사랑스런 유산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그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거나 아쉬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의 장례식은 20년 동안 그 마을에서 살았던 할머니의 장례식이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홀로 살면서도 모든 사람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어린이 야구시합장에 나아가서 지는 편을 응원했습니다. 그리고 성인의 날 전야제에는 언제나 유령 옷을 입고 돌아다니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할머니는 항상 웃음을 띠었고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이 장례식에는 그 마을 사람 전체가 참여하였고 그의 사랑과 선행을 기념하는 축제의 한 마당이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졌으나 가장 귀중한 사랑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또한 파괴하므로 살인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고 또 한 사람은 비록 재물도, 명예도 없었으나 이웃을 사랑하고 사랑의 관계를 맺으므로 더울 풍성한 생명을 누렸습니다.

3. 본문 1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목숨을 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자기의 생명과 삶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우리 인간을 사랑하고 존중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의 참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부정을 통해서 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 거름 나아가서 우리가 안다는 그 사랑을 완성하려면 우리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아니하거나 이웃의 사랑의 자유를 박탈하는 경우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도 못하고 실행하지도 못하는 영점의 인간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딜레마가 있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또한 그것을 실천에 옮길 때만 참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행동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의 사랑할 자유와 사랑 받을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욕망, 편견, 독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웃이 사랑의 자유를 누리고 진정한 삶을 향유할 수 있도록 관심과 지원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부정을 거쳐야 비로써 자기긍정의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기부정을 통할 때만 자기긍정을 발견하게 되고 자기희생을 거쳐야만 참된 자아를 찾게 된다는 진리의 역설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P. 틸리히 는 말하기를 "예수는 자기를 희생하므로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인간적인 모든 욕망과 생각을 온전히 버리고 하느님의 거륵한 인류구원의 뜻에 복종할 때 하느님의 아들이란 영광의 자리 곧 그리스도로 승격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가는 순례자들이 아닙니까!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드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겨드랑이에 성경을 끼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성경구절을 암송하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도 화를 잘 내고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는 시간만 나면 동성연애자가 모이는 커피숍 문 앞에 서서 두나드는 사람들에게 악담을 퍼붓곤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중병에 걸렸는데 알고 보니 수혈을 하다가 에이즈에 감염에 감염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에이즈 환자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피는 사람들은 동성연애자들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 노인이 날마다 자기들을 저주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게 돌보아 주었습니다. 처음에 노인은 지독히 못되게 굴면서 욕설을 퍼부었지만 몸이 약해지면서 그의 증오도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다가 죽기 전 마지막 몇 달간은 호스피스병원에서 동성연애자들에게 둘러싸여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노인에게 유일한 돌봄이었고 위로자였으며 그가 죽었을 때 찾아준 유일한 친구들이었습니다.
이성끼리 사랑할 자유가 있는가 하면 동성끼리도 사랑할 자유가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바울이 동성연애자이었기 때문에 늘 고민하였다는 가정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떤 관습이나, 교리나, 종교의 원리를 가지고 자기의 생각이나 생활 형태와 다르다고 하여 이웃의 사랑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짓밟을 권리는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자녀 중 하나에게 결혼할 자유에 반대하였던 것에 대하여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혼의 결과가 좋다고 해서가 아니라 나에게는 반대할 권한도 없고 딸의 자유만을 손상시켰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가까이 또는 멀리 있는 이웃을 사랑할 자유와 그 사랑을 위해 희생할 책임만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을 되찾는 인격적 신앙의 완성에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간의 사랑의 자유를 무참히 밟아 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알게 모르게 가깝고 또한 먼 이웃의 사랑의 자유를 유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웃의 사랑을 희생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랑도 희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더욱이 이웃의 사랑의 자유를 빼앗는 사람은 살인자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편견과 아집과 잘못된 신앙으로 이웃을 백안시하고 소외시키고 심지어 저주까지 일삼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의 본질과 사랑이 완성되는 길을 찾았으니 그 길을 잃지 않고 열심히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이웃의 사랑도 인정하고 우리의 사랑도 인정받는 아름다운 삶과 사회를 창조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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