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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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되신 하느님 `


이 계준목사

이사야 7:13-16, 요한복음 1:14



1.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죄렌 킬게골의 글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나라 왕자가 자기의 미래 여왕이 될 아름다운 여인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한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리로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하고 당장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후에 그는 다시 그 도시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왕자는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여성을 만나고 아내로 맞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었습니다. 비록 자기가 왕자이지만 사랑의 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농부로 가장하고 그 여자의 관심을 산 다음 정식으로 약혼하고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적당하다고 판단되어 포기하기로 하였습니다.
마침내 왕자는 한 가지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즉시 자기의 왕복을 벗어버리고 그 여자가 사는 동리로 집을 구하여 이사하였습니다. 그는 목수 일을 자기의 직업으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일할 때나 쉬는 때 그 곳 사람들과 사귀고 그들이 쓰는 말을 배우고 그들의 관심사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운이 좋으면 그 여성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고 친숙해 지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기가 이미 그 여성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여성도 자기를 사랑하면 그때 자기 정체를 알리려고 하였습니다. 과연 뜻대로 되어서 왕자는 자기가 사모하던 여성을 만나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킬케골이 기독교의 난해한 성육신 진리를 이야기로 쉽게 풀이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스스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직접 오셔서 구원의 사랑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즘 시중 극장가에서 상영 중인 “피아노 치는 대통령”의 이야기도 킬케골의 이야기와 흡사합니다. 대통령이 자기 딸의 학교 교사를 사랑한 나머지 자기의 체통을 모두 버리고 사랑을 속삭이고 멀리 시골 학교로 도망친 여인을 찾아 자기의 사랑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매우 순수하고 코믹한 좋은 영화였습니다. 그러나 킬게골의 이야는 왕자가 목수가 된 것이고 영화에서는 대통령이 자기의 직위를 버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의 사랑과 세속적 사랑의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신약성서의 본문인 요한복음 1:14은 다음과 같이 씌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이 난해한 구절은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압축하여 간결하게 표현한 귀중한 말씀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 말씀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으로 모든 만물을 만드셨으며 그 말씀을 통해 만물들이 생명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은 곧 빛이었다고 요한 기자는 서두에 말하고 있습니다(1:1-4).
우리가 아는 대로 “말씀”이란 말은 그리스어의 로고스(Logos)로서 인간의 이성(理性) 또는 우주의 원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로고스와 흡사한 말로 “소피아”(Sophia) 곧 지식 또는 지혜를 가리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로고스는 남성명사이고 소피아는 여성명사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대명사 격으로 남성명사인 로고스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희랍철학에 정통한 지식인으로 그리스문화에 크게 영향 받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어휘로 하느님의 구원의 진리를 설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실상 로고스란 말은 원래 매우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요한 기자는 그것을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을 위해 역사에 오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활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추상명사인 로고스는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예수를 지칭하는 말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은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라는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신비한 드라마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는 곧 임마누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진리의 본체인 하느님은 추상적이고 신비적인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가장 물질적이고 인간적이며 역사적인 옷으로 갈아입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2000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아기 예수로 탄생하신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나사렛에서 성장하였으며 목수로, 또는 농부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하였습니다. 그는 당시의 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하느님의 아들 곧 메시아 의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하느님의 구원의 사랑을 가르치고 온갖 병자들을 고쳤으며 소외된 자들과의 교제하고 그들의 인격을 높여 주었으며 기성종교인 유대교의 타락상과 로마 식민지 치하의 구조적 사회악에 대한 신랄한 비판 등을 통해 하느님의 온 인류를 향한 사랑과 정의를 선포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일신상의 안전을 도모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만을 이르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였습니다. 그런 행태가 골고다로 가는 길인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일본에 갔던 우리 일행은 우에노 공원에 있는 어느 대학 미술관을 찾았습니다. 마침 그 곳에서는 16세기 르네상스 및 로코코 미술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그림 중에 나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예수께서 양편에 도둑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 화가는 예수와 도둑들의 복부를 대조시켰는데 예수의 배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어 보이는 반면에 도둑들은 얼마나 처먹었는지 배가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예수의 자기 부정적 삶과 도둑들의 자기 배만 채우려는 인간적 욕망을 비교시킨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자기의 사랑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사람으로 오시고 사시고 자기희생을 자초하신 것입니다.
20세기의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개미떼가 모여 있는 곳을 발로 밟으면 어떤 놈은 죽고 또 어떤 놈들은 비실거리며 도망치느라고 야단법석을 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개미가 될 수 있다면 그들이 무어라고 떠들고 있는지 들을 수 있고 그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우리 자신이 개미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상황을 알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형편을 살피시고 도우시기 위하여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고 영원한 생명과 자유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우리 인간 밖에 어떤 존재가 되어 그들을 진정으로 만나고 교통하며 어떤 도움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우리는 예수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을 힘입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 기자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 곧 예수의 인격과 삶 속에 하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감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부지불식간에 어떤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섬광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담대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자기희생적 삶 속에서 그 영광이 번득이는 것을 요한은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는 인간의 이기주의적 간구를 통해 물질적, 사회적 욕구가 충족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나눔의 삶 속에 그 은혜가 가득 찬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진리는 고명한 희랍 철학자의 책에 담긴 메마른 지식이 아니라 예수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를 만나고 대화하고 함께 어울렸던 무리들이 그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분명히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한 기자는 공관복음 기자들과는 달리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한 10:30)는 말로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시하였습니다.
이렇듯 예수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된 초대교인들은 그 놀라운 구원의 사실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그 사건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참된 질리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며 뒤따르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진리에 빠져든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수가 오시고 또한 걸어가신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간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사람 되신 신비한 사건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드리므로 스스로 하느님의 사람들로, 예수의 제자로 자처하면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자기희생적 사랑의 생활을 실천하며 온갖 고난과 박해와 싸워 승리하였던 것입니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비극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의 신학을 주장하여 일약 대 신학자가 된 스위스 바젤대학의 칼 바르트 교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3가지로 나누어 표현하였습니다. 첫째는 성육신된 말씀(Incarnated Word) 곧 예수 그리스도이고 둘째는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곧 성서이며 셋째로 선포된 말씀(Proclaimed Word)곧 설교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말씀(Living Word) 곧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인은 곧 하느님처럼 되어 가야 한다는 매우 심각한 신앙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감히 하느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상대적인 차원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이 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에게 그런 요청을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제아무리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며 성경을 수백 번 읽고 암송하며 또한 한 평생 설교하고 그것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안에서 사람으로 나타나신 하느님을 만나고 그와 하나 되고 그 삶의 모습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인간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신다는 기독교의 진리는 거짓과 허무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지난주 고(故) 다가도 가나매 선생의 일주기 추도예배에 참여하기 위하여 일본 도교에 다녀왔습니다. 그 분은 일본에서 보기 두문 3대째 기독교인입니다. 그는 동경신학대학과 미국의 명문 뉴욕의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한 신학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권주의를 반대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목사가 되지 아니하고 평신도로 있으면서 기독교 문서 사업을 위해 일평생 일본기독교서회 총무로 종사하면서 크게 공헌 하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기독교 문학에 심취하여 러시아의 문호 도스도이에프스키 전문가가 되었고 많은 희곡을 썼습니다.
더욱이 그는 일본에서 생체실험으로 희생된 우리의 애국시인 윤동주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많은 연구를 하였는데 약 10년 전 그의 윤동주에 관한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다가도 선생은 한일 관계가 열리게 되자 양국의 기독교 문학 교류를 위하여 모임을 만들고 그것을 위해 열정을 쏟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 모임은 근 20년 계속되어 왔고 우리 교회도 그 모임을 위해 선교비를 보내고 있습니다.
다가도 선생이 한일 기독교 문학 교류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헌신한 동기는 일본식민지통치가 한국인에게 저지른 죄에 대하여 그가 깊은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시고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이 그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자기 민족의 죄를 자기 등에 지고 평생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는 용서 받지 못할 자기 민족의 죄를 조금이라도 용서 받고 한일 간의 화해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희망과 기대로 자기 겸손과 친절과 희생의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다가도 선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만나고 그 삶의 모습을 자기 것으로 승화시킨 참 하느님의 사람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는 “밤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란 윤동주의 서사시를 삶에 실천 함 으로서 하느님과 사람 앞에 부끄럼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몇 명의 일본인 친구와 교제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가도 선생처럼 인격적이고 친 한적이며 참 신앙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의 삶을 기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기다리는 대림절 중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하느님에 대하여 사도들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신앙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우리 안에 충만함으로서 이제 사람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하나 되며 하느님의 대행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일이 우리 자신들과 함께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고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도록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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