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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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새 역사의 주인인가?

이계준목사

이사야 66:18-23, 마태복음 3:13-17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시금 새로운 한해를 주셨습니다. 지난 해 우리의 불신앙과 무화과나무와 같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한 우리에게 무엇으로 살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소중한 시간인 365일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이 한해를 어떻게 값진 신앙과 삶으로 채울 것인가 하는 일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인간은 시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동물입니다. 우리는 다른 동물들에게서 시간문제를 가지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들은 시간이란 개념도 없고 시간을 세는 시계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인간만이 시간의 가치를 알고 시간을 이용하여 삶을 계획하고 실천하며 약속하고 만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활동을 통하여 새로운 문화와 문명, 삶과 역사가 창조됩니다.
새 해란 시간은 물론 낡은 해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새 해를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삶과 역사를 만드는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새 해를 맞을 때마다 새 계획을 가지고 새 각오로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새 해가 밝아오면 새로운 희망을 염원해 봅니다. 지난해의
바람직한 일들은 계속 발전하기를 바라고 우리에게 고민과 아픔을 주었던 일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순박한 소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희망과는 관계없이, 오히려 불안과 절망으로 채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초하루 날 새해의 떠오르는 희망찬 태양을 보기 위하여 수많은 인파가 동해안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수평선 선상에서 이글이글 타는 태양이 솟아오르기를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수평선 위에는 검은 구름 띠가 드리워있었고 한참 후에야 맥 빠진 태양이 구름 위로 떠오른 것입니다. 이 자연의 현상은 올 한해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듯 합니다. 즉 금년에 우리의 삶에는 어두운 그림자와 함께 밝은 빛이 공존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지난 12월 19일 노무현씨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새 해를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지지한 젊은 세대나 반대한 기성세대나 모두 새 정부에 대한 어떤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노씨의 당선을 극도로 비판하는 사람이라도 이민가지 아니하고 이 사회에 남아 있는 한 막연한 기대라도 갖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E. 프롬의 말처럼 희망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어두운 그림자로 뒤 덥혀 있습니다. 북한의 핵 문제에 대한 국 내외의 의견충돌, 미국을 위시한 국제경제의 불안, 미 이라크 전쟁의 가능성, 노무현 정권에 대한 기대와 불안 등 우리의 희망을 감소시키는 불확실성의 요소들이 쌓여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와 역할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에 대하여 책임지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인생관은 경박한 난관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망적인 비관주의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과 신앙 안에서 모든 절망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며 희망찬 새 역사를 창조하는 주인인 것입니다. 이 시간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하신 일을 함께 명상하면서 우리의 길을 찾고자 합니다.

1. 새 역사의 주인은 낡은 것을 버려야 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지배하는 곳으로 인간의 권력과 부패가 지배하는 이 세상의 나라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건설하여 새 역사를 시작하려면 예수께서는 먼저 낡은 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낡은 유대 전통 속에서 자라고 형성된 자기의 낡은 존재를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례 요한을 찾아갔습니다.
세례 요한은 누구입니까? 그는 광야에서 살면서 회개를 외치는 예언자입니다. 그는 잘못된 삶과 역사를 끊어버리라고 단호하게 외쳤습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두르고 석청을 먹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괴벽한 성격의 소유자이거나 정신병 환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당시 지도층이 살아가고 있는 삶과 진행되고 있는 역사의 방향에 대하여 자기 온 몸을 다하여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회개 곧 방향전환을 외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외침을 광야의 소리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이 도시가 아니라 광야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가 도시의 향락과 사치를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권력과 결탁한 사회 및 종교 지도자들의 부정과 부패에 항의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역사 곧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전에 이렇게 낡은 현실과 역사를 부정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는 세례를 통하여 자신의 낡은 존재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말하기를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하면서 사양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낡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요청합니다. 그것은 새 역사 창조를 위해서 낡은 것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이후에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꼭 같이 나타나는 현상은 과거청산입니다. 낡은 것을 버리자는 운동입니다. 낡은 조직을 개혁하고 낡은 정치를 포기하고 낡은 정치인을 도태시키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낡은 것들을 과감히 포기하지 않는 한 새 역사를 창조하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은 정치계나 정치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민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의 나라 선포의 위임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보다 무거운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회의 암적 요소인 연고주의와 부정부패와 집단이기주의를 하루 속히 내 마음과 생활에서 씻어버리고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그것들을 청산하는데 앞장 서야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물량주의, 권위주의, 세습주의를 청산하는데 솔선해야 합니다. 우리가 도덕적 혁명의 주체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950년 프랑스 출신의 마틴 신부가 구걸하고 도둑질하는 아이들을 위해 아프리카 어느 지방에 전셋집을 마련하였습니다. 거기에서 지내는 한 소년이 하루는 어떤 사람에게서 소매치기한 배당금으로 100프랑을 받았습니다. 이 소년은 주머니에 챙기고 싶었지만 왕초인 바오로에게 가져갔습니다. 왕초는 말하기를“그것은 더러운 돈이니까 갖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거기서 소년들은 100프랑을 어디에 쓰면 좋겠는지 토론하게 되었습니다. “축구공을 사자”, “영화구경을 가자”고 하니 자기네 돈이 아니고 주인에게 돌려주자니 누군지 알 수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왕초는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돈이 아니고 더러운 돈이니 태워버리자”고 제안하니 만장일치로 가결되어 라이터로 돈 100프랑을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새 해에 새 역사의 주인이 되려면 낡은 우리의 생각, 행동, 신앙을 깨끗이 씻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2. 새 역사의 주인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신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내린 것입니다. 낡은 것을 버리자 새 것이 나타났습니다. 낡은 존재를 버려야 하늘이 열리는 것입니다. 낡은 역사를 버려야 새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영”이란 말은 헬라어로 “프뉴마”인데 바람이 분다는 동사에서 온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의 숨, 하느님의 바람과 같은 뜻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임할 때 새 역사 곧 하느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태초에 암흑과 혼돈 위로 하느님의 바람(루아하)이 움직일 때 하늘이 열리고 땅이 생겼으며 그 안에 사는 모든 생명이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이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드시고 그 코에 하느님의 숨(루아하)을 불어넣으시니 인간이 탄생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은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영을 받은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모든 죄로부터 해방되어 절망과 죽음의 낡은 역사 속에서 희망과 생명의 새로운 역사를 선포하고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영을 받은 예수로 인해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지난 2000년 인류역사에 있어서 새 역사를 창조하는 원년인 동시에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 나라에 개신교가 들어 온지 120년이 가까워 옵니다. 그 동안 성령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나타났고 성령 충만한 부흥운동을 통하여 교회수가 5만이고 교인수가 천만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 밖의 부패한 낡은 역사는 새로운 것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영은 하느님의 영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 된지 60년 곧 2세대가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출 애급 하여 광야에서 가나안 복지를 대망하는 이스라엘민족처럼 과거의 노예근성인 이기주의와 무책임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받았다는 성남성녀들은 많은데 역사의 변화는 없다는 것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인 동시에 과제이기도 합니다.
지난 선거에서 노후보가 당선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젊은이들의 PC통신망을 통한 홍보작전이었다고 합니다. 이 새로운 작전을 통하여 세 김씨의 보수정치를 마감하고 부정부패의 사술을 끊음으로서 새 사회, 새 역사 창건에 기초를 놓을 수 있으리라고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 합니다.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비록 젊은이들의 열정적인 바람이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새 역사로 바꿀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바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생명을 창조하며 무로부터 유를 만들어 내지만 사람의 바람은 인간을 교만하게 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욕망을 불태우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 이태리를 공격하게 된 미군의 한 사령관은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시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제 상륙하면 이태리군과 싸워야 한다. 혹시 귀관들의 몸에는 독일인이나 이태리인의 피가 흐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귀관들의 부모와 조부모들은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용감한 사람들임을 명심하라. 그런데 우리가 지금 싸우려는 적의 조상은 대서양을 건널 용기를 갖지 못하고 노예적 삶을 감수했던 비굴한 인간들이다.” 이 지휘관은 장병들에게 새 역사를 창조할 정신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군가에 의하여 만들진 불의와 부정의 현실 속에서 아무런 주체의식 없이 노예처럼 살다가 죽으려고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을 받은 것은 이 낡은 역사를 하느님의 뜻 곧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차고 넘치는 역사로 바꾸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 새 역사가 창조됩니다.
이제 우리는 ·새 역사의 문을 열어주신 예수님을 따라 새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새 부대가 주어졌는데 낡은 포도주로 채워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새 역사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낡은 생각, 낡은 생활 그리고 낡은 존재까지 철저하게 버려야 합니다. 우리를 속물로 만드는 욕망, 자만심, 이중성, 편견, 시기, 질투, 편협과 배타심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 모든 것과 함께 나 자신의 겉과 속을 요단강의 거룩한 물로 깨끗이 씻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낡은 것들과 낡은 존재를 아낌없이 내버릴 때 하느님의 영이 임하고 그의 바람이 불어오며 참 생명이 움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새 역사 창조를 위해 하느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카라일이 한 번은 런돈교(橋)를 지나면서 빈민굴의 참상을 보고 하늘을 향해 원망스런 음성으로 “하느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신이 직접 빈민굴에 손을 대시거나 역사를 변화시키는 일은 없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서 비젼을 가진 진실된 사람들을 불러서 그의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독일교회의 평신도 운동인 kirchentag의 창설자 라이날트 본 타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군의 장교로 차출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언제나 논리적으로만 행동했으면 나는 전쟁 난지 첫 달에 양심적인 반대자로 교수대에 올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독일 군 장교로서 매 순간마다 책임의식을 가지고 살아보려고 결심하였다”고. 그는 점령지의 분대장으로 있는 동안 그 곳의 시민들을 나치와 게스타포에서부터 보호 하였습니다. 학생들을 독일에 강제 노동자로 보내는 일도 거절하였고 대학총장의 생명을 구해 주었으며 포로들을 처형하고 죄수들을 죽이는 일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자마자 루베인이라는 도시의 시민들은 본 타덴을 모셔다가 그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를 찬양하는 대규모의 시가행진을 버렸다고 합니다.

누가 새 역사를 만드는 주인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의 낡은 모습을 청산할 때 하늘에서 내리는 영을 받고 새로운 모습으로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영의 사람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누룩이 될 때 낡은 역사는 새로운 역사로 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새 해에는 우리 모두 새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 되도록 믿음의 선한 싸움에 전력투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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