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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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 편인가?



이계준목사

성경말씀:출애급 32:1-6,
마가 9:38-41, 고전 3:3-9

최근에 정권 이양 과정에서 여러 가지 우려되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정권 인수위원회가 공식, 비공식으로 발표하는 섬직한 정책들과 위원회와 정부 부처간의 갈등 그리고 위원회와 기업 간의 갈등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 인터넷에 소위 민주당 살생부라는 것이 올라와서 그 당과 온 국민이 놀라고 당황하게 하였고 당 내에서는 진화 작업에 진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노무현씨 당선을 위해 수고한 특등 공신을 비롯해서 1, 2, 3등 공신과 역적과 역적 중의 역적 그리고 판단 유보자 등 민주당 국회의원 전원에게 등급을 매기면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였습니다. 이 살생부는 비교적 정확하다는 등, 이것을 만든 장본인이 거의 확실시 된다는 등 의견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우리 같은 정치 문외한이야 그것이 얼마나 정확한지 또는 누가 작성했는지 알 수도 없고 구지 알려고 눈을 부릅뜰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숙청의 대상에 오른 사람들은 참으로 곤혹스럽고 처절하기 까지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의견의 차이도 생기고 동질적인 사람들 끼리 서로 뭉치는 경우도 흔하며 특히 이해관계가 있는 일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 환경은 옛날 김씨, 이씨, 박씨 등의 마을과 같이 단순하고 획일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지구촌이란 넓은 세상에서 매우 다양한 배경과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서로 갈등하고 협력하고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지구촌의 다원사회에서 정치하는 집단 속에서 살생부가 나왔다는 것은 극히 시대착오적이고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은 우리 민족이 그렇게 편 가르기를 좋아하고 상습화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인연, 학연, 지연 등이 곧 편 가르기가 아닙니까? 그래서 정치집단이나 기업체나 심지어 종교집단 마저도 편 가르기에 따라 형성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어떤 목사가 후배와 논쟁하면서 묻기를 “너는 누구 편이냐?”라고 하였다는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잠재해 있는 원시적 편파성입니다. 이런 의식과 행위는 어떤 구실을 붙인다고 해도 결국은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란 사탄이 그 뒤에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 전체는 물론이고 특히 정치 분야가 대화와 이해와 협력을 통해 새롭게 발전하지 못하고 항상 깨지고 새로운 이해관계로 다시 뭉치고 또 다시 멸망하는 악순환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누구 편인가?”를 중요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살면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편에 서야 하는지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출애급기 32장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있을 때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간 후 발생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믿고 애급을 떠나 온 백성들이 모세가 40일 간이나 보이지 않자 그들은 불안해 지고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형이자 또 다른 지도자인 아론을 찾아가서 자기들의 지도자가 되어 주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동생의 그늘 밑에서 쌓인 열등의식을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아론은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의견을 수렵하여 우상을 만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론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급부치를 모두 모아 오도록 명령하고 그것을 녹여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외치기를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신이다”고 하면서 내일 제사를 드리자고 하였습니다.
시내 산에서 하느님에게 십계명을 받아 들고 내려 온 모세는 이 관경을 보고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 운명을 결정할 거룩한 계명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간 동안 이 무지한 백성들이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하느님 대신에 우상을 만들어 절하는 불신앙과 자기 대신에 아론을 지도자로 삼은 배신행위를 생각할 때 모세는 크게 격분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누구든지 주의 편에 설 사람은 나에게 나아오십시오”라고 하니 레위 자손들이 나아와서 하느님 편에 섰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그들을 무장시키고 아론 편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게 하였습니다. 레위 자손들의 칼에 죽은 사람들은 그들의 친척, 친구, 이웃들이었는데 그 수가 3000에 달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비극이 모세의 편과 아론의 편싸움이 아니라 하느님의 편과 인간의 편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아론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훌륭한 지도자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요청으로 지도자가 되었고 그들이 원하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므로 그들을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아론은 오늘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국민이 선출한 민주적인 지도자인 셈입니다. 그러나 그는 금송아지가 인간의 물질적 요망을 대변하는 우상인 동시에 그 우상은 곧 인간 자신을 신격화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민족을 출 애급 시킨 야훼 하느님을 배신하고 무지한 백성 편에 서서 그들을 바로 인도하지 못한 준비되지 않은 지도자이었습니다.
반면에 모세는 인간의 섭섭함이나 배신을 넘어서서 자기편을 찾지 아니하고 하느님 편에 서는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레위 자손들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비극을 감수했던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의 뜻대로 자기편의 사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상황은 아마도 정반대로 흘렀을지 모릅니다.

2. 마가복음 9:38에 요한이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을 귀신들을 내 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하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라는 말은 우리의 편이 아니라는 강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 말 속에는 요한의 분노나 특권의식이나 심지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랐다고 하는 역사의식 같은 것도 밑바탕에 깔려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라는 말 속에는 그 당시의 가치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나와 너라는 이분법만 있고 우리라고 하는 공동 개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분법은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형식적으로는 다르지만 내용적으로는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은 우리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것은 공동체적인 뜻이 아니고 ‘집단적 개인’ 즉 나와 어떤 관계로 직결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쓰는 ‘우리’라는 말은 우리 편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편과 너희 편이 확실히 구분된 집단적 이분법 -이것은 내가 발명한 용어라서 특허를 낼 생각되는데- 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딸과 아들을 가진 부인이 시장에서 아는 부인을 만났습니다. “안녕하세요? 따님도 잘 지내지요?”라고 인사를 받고 하는 말이 “네. 덕분에요. 우리 딸은 팔자가 늘어졌답니다. 사위가 자상해서 밥부터 빨래까지 다 해줄 정도니까 오후까지 자고 일어나 미장원에 들렀다가 백화점에 가서 쇼핑하구요. 물론 저녁은 외식하며 귀족처럼 살고 있답니다.”
이 말은 들은 여인은 얼굴에 미소를 지우면서 “아드님도 결혼했지요? 어떻게 지내지요?”라고 물으니 부인은 얼굴이 찌부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아들은 지독히 운이 나빠요. 그 못된 마누라가 한낮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고 남편에게 밥상 차리라고 하지 않나 집안일은 하지 않고 미장원과 백화점에만 드나들지를 않나. 그 뿐인 줄 아세요? 저녁 해 먹을 생각은 않고 밖에서 비싼 음식을 사 먹질 않나. 정말 우리 아들은 마누라 잘 못 만났어요.”
이 부인의 의식은 딸과 며느리의 꼭 같은 상황을 내편, 네 편으로 갈라놓고 있는 전형적이고 흔히 볼 수 있는 모델입니다.
사랑하는 제자 요한의 우리 편이 아니라는 말을 들은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막지 마라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가 9:39-40). 요한은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려고 했는데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딴 판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분법적인 생각을 버리시고 제3의 길은 제시하였습니다. 이것은 너와 내가 만나서 우리가 되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어울리며 손잡고 갈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최근에 전경련의 한 간부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 인수 위원회 위원들이 사회주의적이라고 말했다고 하여 인수위원회와 전경련 사이에 실랑이가 오고 간 일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인수위원회가 알레르기성 과잉반응을 나타낸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민주주의자,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나 같은 반공주의자, 심지어 김정일 우상 숭배자까지 온갖 이념의 소유자들이 거의 합법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에 사회주의자란 칭호가 무슨 큰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그런 성향의 인물들이 많고 모든 새로운 정책을 보아도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같은데 말입니다. 다원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이분법적인 사상이나 가치관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갈 수 있는 어떤 공통의 길을 찾아서 사랑과 정의, 자유와 평화가 차고 넘치는 나라와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3. 고린도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인들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아직도 육에 속하여 시기와 싸움을 일삼으면서 “나는 아볼로 편이다.” 또는 “나는 바울 편이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갈등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했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주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고전 3:5-7)
사도 바울은 여기서 교회는 하느님에게 속한 것임을 밝히고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각을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착각하고 편 갈라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비록 교회는 사람이란 도구에 의하여 운영되지만 교회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고 발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하느님을 제쳐놓고 그 대신 인간이 주인이 되어 좌지우지하게 되면 편이 갈라지고 편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근자에 어떤 교회는 교역자와 여자 전도사 간의 문제로 편이 갈라지기 시작하면서 한 편에서 예배드리면 다른 편에서는 예배를 방해하는 해괴한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편싸움이 점점 붉어지면서 이제 법정에 까지 가게 되므로 교회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선교의 길을 막아버리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가 사람 중심으로, 사람의 생각에 의해 좌우될 때 오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흡사한 실례는 아마도 한국교회치고 겪어보지 않은 교회가 거의 없을 정도이고 외국의 한국 이민교회에서는 항상 일어나는 다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수는 계속 늘어나고 어떤 교단은 분리된 교파만도 50개가 넘을 정도 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는 누구 편이가?”하는 질문을 자주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삶이나 가정생활이나 사회활동이나 교회생활 속에서 나는 “누구 편인가?”하는 질문을 양심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자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인습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대부분 어느 편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떠나 그 무엇을 우상으로 만들어 승배함으로서 자기 멸망을 자초할 뿐만 아니라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즉 자기 자신이나 자기편을 절대화하고 다른 편을 상대화하므로 이웃과 사회 간의 갈등을 조장하고 조화를 깨뜨리게 됩니다. 교회의 주인이 하느님이신데 마치 사람이 주인인 것처럼 여기므로 편이 갈리고 시비가 난발하여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열정적인 신앙과 함께 냉철한 양심과 생각을 가지고 우리의 현 위치를 항상 점검하고 언제나 하느님 편에 서 있도록 신앙과 지혜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편에 굳게 서서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아니하는 공평무사하게 사리를 판단하고 처리하는 예수님과 같은 인격의 소유자가 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을 해소하고 편싸움 속에서 화해의 길을 모색하며 불협화음을 아름다운 화음으로 바꾸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는 교회가 하늘의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차서 사람들의 영원한 쉼터가 되고 선교에 매진하는 주님의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심고 아볼로처럼 물을 줄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라게 하시는 은총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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