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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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셨습니까?
몇 번 왔더니, 이제는 신반포교회에 오면 푸근합니다. 이제는 인생이라는 한 배를 탄 한 식구라는 생각으로, 서로 삶을 나누는 그런 공동체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저는 "삶과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자 크게 낙심해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라는 도시로 가고 있던 두 제자에게 일어난 일에 관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오늘 제가 주로 관심하는 것은, 이 두 제자에게 예수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이 두 제자는 예수를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로 기억하고 있었고, 비록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법정에 넘겨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는 했지만, "그 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으로, 이스라엘이 "소망을 걸고 있었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제가 이 본문을 통해 우리들의 화제로 삼고 싶은 것은, 우리들은 먼 훗날 사람들에게 과연 어떠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미 중년 이상의 나이가 드신 분들은 간혹 불현 듯 이런 생각을 해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생각을 모두가 같이 해보면서,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제가 아주 가깝게 지내는 분 중에 이장로님이라고 계신데, 한번은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이 죽어서 관 속에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관 속에서 자신이 살아서 관의 틈으로 바깥을 볼 수 있게 되었답니다. 통상 이런 경우라면, 누구나 소리를 쳐서 관 뚜껑을 열게 하는 법인데, 이 분은 관 속에서 바깥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구경하게 되었답니다. 확실히 꿈은 꿈이었던가 봅니다.
그런데 관 안에서 바깥 광경을 보고있던 이 분은 매우 서운하기도 하고 또 서글픈 느낌을 갖게 되었답니다. 이 분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대학생이 된 두 딸이 있는데, 관 안에서 바깥을 보니까, 사람들이 문상 온 자리에서 이 세 사람이 슬피 울면서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같이 행동하기는 하는데, 자기가 보기엔 그렇게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같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리내어 큰 소리로 울다가도, 누군가가 와서 장례식장 대여비가 얼마고 관 값, 음식값, 묘지 값이 얼마라고 하면, 언제 울었는가 싶게 눈물을 뚝 그치고는 남대문 시장에서 옷값을 흥정하듯 그 비용을 흥정하면서, 자신의 죽음은 싹 잊어버린 듯이 행동하더랍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들이 가고 나면 마치 배우가 "Q" 사인이 나면 지금까지 하던 모든 행동을 멈추고 연기에 열중하듯이, 초상 당한 사람에 걸맞게 또 다시 큰 소리로 울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분이 하는 말이, 실제로 자기가 죽고 나면, 자신의 식구들이 자신의 죽음을 과연 얼마나 슬퍼할 것이며, 또 자신을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해 줄지, 그리고 자신을 어떠한 사람으로 기억하게 될 지를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서글퍼지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심히 걱정스럽더라는 것입니다.
이야기 초두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해서 미안합니다만,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꿈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반드시 죽음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가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과 헤어져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우리를 얼마나 오랫동안 또 어떠한 사람으로 기억하게 될까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관심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간혹 아주 어린 시절이나 학창시절에 가까왔던 친구, 선후배, 혹은 선생님을 기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 얼굴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분들과 함께 했던 경험이나, 그 분들이 말하거나 행동했던 어떤 특별한 것들은 기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설혹 부분적으로는 잊어버린 것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통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을 간직하게 됩니다.
저에게도 그러한 분이 한 분 있습니다. 금호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지동원 선생님이 그 분이신데, 그 분은 저희 집이 가난하여 점심을 싸갈 수 없을 때에, 어느 날 선생님의 도시락 절반을 저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이 사건은 제가 공부에 흥미를 갖게 만들어 주었고, 제가 가진 적은 것을 저보다 가난한 사람과 나누며 사는 나눔의 삶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얼굴은 희미하지만, 그 분이 제게 베푼 것과 그 분에 대한 인상은 뚜렷합니다. 저는 이 분을 2년 전에, 그러니까 선생님과 헤어진지 35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다시 만난 그 분은 여전히 훌륭한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러면 이와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우리들의 어린 시절 친구나 선후배, 혹은 선생님은 과연 지금 우리들을 기억하고 있을지요?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까요? 만약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우리들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까요?
과거의 사람들이 현재의 우리에 대한 기억은 그렇다치고, 미래에는 어떻게 될까요? 앞으로 10년, 20년, 혹은 30년 뒤에 지금 우리들과 가깝게 지냈던 분들은 과연 우리들을 기억하게 될는지요? 다행히 기억한다면, 그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게 될까요? 기간을 더 멀리 잡아 볼까요? 앞으로 100년 뒤에 과연 우리들은 후손들에게 기억될 수 있을지요? 기억된다고 가정해 보지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요?

한번은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뉴욕에 있는 한 교인 집에서 몇 해 전 돌아가신 권사님의 추도예배를 집례하면서 웃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돌아가신 권사님의 남편되시는 80세가 넘은 장로님 한 분과 60을 전후한 아들 딸들, 손녀 손자들, 그리고 증손주들까지 있었습니다. 저는 추도예배 순서의 하나로,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돌아가신 분에 대한 좋은 기억들이 있으면 한 두가지씩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좋은 기억들을 한 두가지씩 이야기 하더니, 갑자기 60을 전후한 자식들이 어머니 권사님은 아버지 때문에 고생만 잔뜩 하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앞에 계신 80 넘은 아버지 장로님을 향해 공격의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저런 사례들이 들춰지게 되었고, 한 사람이 공격하면, 다른 자식들이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제 딴에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좋은 기억을 나누려던 시간이, 갑자기 살아계신 아버지에 대한 성토장으로 바뀌면서, 분위기는 설렁해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 저는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살아계신 저 장로님이 돌아가신 후, 만약 그 분의 추도식에서 저처럼 눈치없는 어떤 목사님이 돌아가신 분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과연 어떤 광경이 벌어질까? 만약 그 나이많은 장로님도 저같은 생각을 했다면, 아마 온 몸이 오싹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일이 있은 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의 경우는 어떨까?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된 뒤 나의 후손들은 나를 기억할 것인가? 기억한다면,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후손들에게 기억될 만한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나의 삶 가운데 과연 후손들이 기억할 만한 것들이 얼마나 있을까?

유교의 제사법에 따르면, 조상제사는 5대조까지만 지낸다고 합니다. 그것은 5대째 후손에 가면, 그 선조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삶은 과연 다섯 세대 이상은 기억될 수 없는 것일까?
물론 사람들 중에는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 단 한사람도 기억해주지 않아도 좋다. 나는 내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죽겠다. 어차피 인생은 죽으면 그만 아니냐.' 이런 사람을 우리는 막가파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막가파도 실상은 주변 사람들이 아무도 자기를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렇게 초연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한 친구가 자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든지, 혹은 과거에 좋아했던 선생님을 찾아가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댁이 누구시더라"하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낯설어 한다면, 막가파라 하더라도 인생이 갑자기 서글퍼지게 될 것입니다. 살아서조차 기억되지 않는 사람은, 사실은 살아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래 기억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역사에는 수 백년 수 천년이 지나서도 기억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차라리 사람들이 자기를 기억해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를 그 한 좋은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는 1930년 대 초부터 1945년까지 유럽지역에 있던 유대인들을 자그마치 600만 명이나 죽였습니다. 거기에는 병약한 노인도 있고, 임신한 부인도 있고,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분간조차 못하는 어린아이도 있었습니다. 역사를 배운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히틀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가 한 행동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히틀러는 그렇게 잔악한 행동을 하고 자살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가족과 후손들은 자신들의 조상 중에 히틀러가 있었다고 하는 것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눈총을 받고 숨죽이며 살아야 했겠습니까?
히틀러가 너무 멀리 있는 사람이라면, 80년대에 민주인사들을 각종 고문으로 학대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이라는 형사를 생각해보세요. 역사는 이러한 사람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당사자들이 받아야 하는 따가운 시선은 물론, 그들이 죽은 다음에도 사람들은 그를 악인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고, 그 가족과 후손들은 선조를 잘못 둔 것 때문에 대대로 주변사람들로부터 눈총을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역사에 오래 기억되기를 원한다면 모르지만, 이러한 기억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빨리 지워지면 지워질수록 좋은 기억일 것입니다.

반면에 역사에는 오래 기억되어 좋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슈바이쳐가 있고, 인도에서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했던 간디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몸바쳐 일한 테레사 수녀가 있고, 미국에서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 대통령과 흑백차별을 없애기 위해 희생을 각오했던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깝게 한국 안에는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앞장 섰던 문익환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이 연구되고, 점점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게 됩니다.
그러면 역사상 가장 오래도록,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분으로 기억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중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예수일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고 있던 그 두 제자에게 예수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로 기억되고 있었고, 또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 이스라엘이 "소망을 걸고 있었던" 분으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예수는 그후 2000년 동안 전세계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고, 기독교인 비기독교인의 구분 없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반포교회의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앞으로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어떠한 사람들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지 않은 올곧은 삶을 살아온 분으로 기억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기억하는 것은 여러분의 얼굴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를 깊이 성찰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용기있게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두고 "하나님과 한국 국민 앞에서 행동과 말에 힘이 있는 올곧은 사람," "한국을 구원할 분," 한국이 "소망을 걸고 있었던" 분으로 기억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헌신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기억할 만한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펼치게 될 아름다운 삶 속에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인철 목사

누가복음 24: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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