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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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재판한 주역들


이계준목사

요한 12:12-15,
마가 15:6-15
(종려주일)


1 예수를 재판한 사람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마치시고 십자가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주님을 대대적으로 환영한 민중의 무지와 유대 지도자들의 선동과 빌라도의 정치적 판단이 궤가 맞아 떨어져서 그리스도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종려주일의 의미를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시켜서 빌린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요한 12:13)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를 뜻하는 말로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기쁨과 승리를 나타내는 환호성이었습니다. 이것은 군중들이 예수가 따윗 왕가의 계승자로서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구원할 임금으로 믿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군중들은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께서 유대민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로마의 권력과 싸워서 이스라엘을 해방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환영하고 찬양하던 군중은 불과 몇 일만에 그들의 태도가 180도 돌변하였습니다. 로마정부를 대표하는 총독이자 재판의 최고 책임자인 빌라도가 유대 지도자들이 잡아온 예수를 앞에 놓고 군중들을 향해 물었습니다. 명절 때마다 죄수 하나를 석방하던 관행대로 빌라도는 말하기를 “여러분은 내가 그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기를 바라는 거요?”할 때 군중들은 살인자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를 그토록 환영하고 찬양해 마지않던 군중들이 이제 폭도로 돌변하여 살인자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처형하라고 외치는 저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먼저 이 군중은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말씀도 듣고 병 고치는 것도 보고 떡도 얻어먹은 적이 있으나 진정 그가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군중들은 자기들이 입은 은총을 깡그리 잊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3년간 주님과 동거 동락한 제자들도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랐고 그가 붓잡힐 때 모두 도망쳤는데 어떻게 일반 군중들이 그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이 땅에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선포하고 그의 나라를 세우려고 오셨음을 알고 믿었다면 그런 우는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군중들은 하느님의 나라보다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해방에 더 큰 관심을 가졌을 지도 모릅니다.
민중들이 돌변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유대 지도자들인 바리새파 사람들과 제사장들의 예수에 대한 중상모략과 선동에 넘어간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예수의 말과 행동을 관찰한 결과 그가 유대교의 율법을 비판하고 나아가서 민중을 선동하여 유대교에 도전한다고 선전하며 예수를 음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가 진리를 추구하고 실천하지 아니하고 그것이 물질과 권력 등과 야합하게 될 때 참 진리를 외면하게 되고 새로 등장한 참 예언자를 희생시키는 종교적 역기능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유도한 것이 미련한 군중과 썩은 종교의 노예가 된 유대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최고의 재판권을 쥐고 있는 총독 빌라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 장로들, 율법학자들이 끌고 온 예수를 심문한 다음 죄가 있으면 처벌하고 죄가 없으면 석방할 권리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요?”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당신이 그렇게 말하였소.” 이 한마디를 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일체 언급을 피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이 심문과정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고발하는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가 예수에게 어울리지도 않고 그럴만한 위력 있는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예수가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라고 군중들에게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노력하였다고 하였는데 유대인들이 그에게 협박하기를 “이 사람을 놓아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 폐하를 반역하는 자입니다”(19:12)라고 협박하였습니다. 드디어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군중에게 넘겨주고 맙니다.
우리는 여기서 총독 빌라도는 죄와 무죄를 재판하는 재판장이기 이전에 그는 로마 식민지를 치리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통치하에 있는 이스라엘에서 유대 지도자들과 군중들의 요구를 무시하므로 자기에게 반기를 들고 소란피우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총독의 지위를 뒤흔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빌라도는 예수가 죄 없음을 알면서도 자기 권좌의 유지를 위해 군중의 무지와 유대 지도자들의 간계에 동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사법재판이 아니라 한국에서 많이 보는 것처럼 정치재판을 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면하기 위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였는지 마태복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라도는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과 또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무리 앞에서 손을 씻고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27:24)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에게 나린 십자가 처형에 대하여 스스로 결백함을 주장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지난 2천년 동안 역사적인 교회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계속 고백하고 있습니다. 비록 빌라도는 인간적으로는 예수에 대하여 동정과 순수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보신책으로 정치적 재판을 한 것에 대한 역사적 교회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2. 한 사회학자의 견해
우리는 위에서 예수를 재판하여 그에게 십자가란 사형선고를 내리는데 공헌한 3가지 부류의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군중들은 무지하여 선동의 대상이 되었고 유대 지도자들은 종교 본래의 기능을 저버리고 세속적인 계략에 빠져버렸고 빌라도는 무책임한 행정관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르봉이라는 프랑스 사회학자의 생각과 예수 재판의 이야기를 연계하여 보면 좋을 듯 합니다. 그는 원래 의사이었는데 사회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어 1895년에 “군중심리”란 책을 썼는데 이것은 20세기의 명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20세기에 들어서는 문턱에서 ‘군중의 시대’가 다가옴을 예언하였습니다.
르봉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군중이 될 때 이 군중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이상의 행동을 하게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사회적으로 매우 위험한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억제할 수 없는 집단 난동을 부리고 파괴를 일삼는 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군중 속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 정체성을 잃게 되고 개개인의 행동이 불분명해지기 때문에 무책임해지고 정보나 소식이 끊기기 때문에 소문으로 판단하게 되니까 자연히 비판력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세기는 이런 군중의 시대가 등장함으로 인해서 곤혹을 치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르봉은 위기상황이 닦아 왔을 때 좋은 지도자가 있으면 파멸을 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선동자가 나타나서 군중을 좌우하게 되면 군중은 폭도로 변하여 인간의 생명을 짓밟고 사회질서를 파괴하며 찬란한 문화와 문명을 파멸로 이끌어 갈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르봉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 인간이 지난 20세기에 경험한 것에 적중하였습니다. 히틀러와 같은 나치즘의 선동자와 스탈린이나 모택동이나 김일성과 같은 공산주의 선동자들이 나타남으로써 이 선동자들에 의해서 온 인류는 전무후무한 참혹한 비극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주동이 된 전쟁과 독재와 압박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목숨을 잃고 평생 장애인으로 살게 되었으며 가족을 잃고 외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까?

3. 르봉의 주장은 처음에 말한 예수의 재판에 관계된 이야기와 일맥상통할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민중이 진리를 재판하는 상황이 버러지고 있습니다. 그 일례가 예산 보성초등하교 서승목 교장의 자살사건입니다. 서교장 측과 전교조 측의 말이 다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법적인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교육현장을 개선하겠다는 목소리를 들고 나온 전교조가 교육의 본질인 인간성을 무시하고 자기주장과 선동에 얽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격을 존중하고 생명의 사랑을 기본으로 해야 하는 교육의 현장이 이념의 투쟁 장으로 변질한 것은 군사독재 시대에 순수한 동기로 출발한 전교조가 본래의 궤도에서 얼마나 크게 탈선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에 따라 좋은 이념과 행동도 새롭게 변하지 아니하고 고착되어 있으면 그것은 변질되게 마련이고 드디어는 사회에 유익 보다는 피해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 교육에 총책임을 맡고 있는 교육부는 이 사건에 관하여 아무런 책임적인 말이나 태도를 취하지 아니하고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러시아 공산주의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이념이 제 아무리 이론적으로 완벽하다손 치더라도 종당에는 멸망하고 만다는 역사적 교훈을 이미 배운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는 한국교회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미 수년전에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그런 현실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기억하실 줄로 압니다만 그것은 다름 아닌 감리교단이 변선환 교수와 홍종수 교수의 목사직을 박탈한 사건입니다. 그들은 소위 종교다원주의라는 죄목으로 교회 지도자들에 의하여 교회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대다수의 목사들과 평신도들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두 신학자들을 이단자들이고 기독교를 모독하는 자들로 규탄하였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연구되고 신학대학원 마다 가르치고 있는 다원주의 신학에 대하여 전여 알지도 못하는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한 무리가 되어 두 교수들과 신학적인 토론이나 논쟁도 벌이지 아니하고 유죄로 판결하여 그들을 목사직에서 파면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16세기에 가톨릭교회는 교권주의에 도전하고 성서적 신앙을 주장한 개혁자인 루터와 칼빈을 파면하였고 영국 성공회는 형식주의에 대하며 영적 갱신을 외친 존 웨슬리를 파면하였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 가톨릭교회가 독일 튜빙겐대학의 세계적인 신학자 한스 큉이 교황을 비판한다고 파면하였고 한국감리교회가 1930년대에 신비주의자 이용도 목사를 파면하였으며 1980년대에 다시 변선환, 홍정수 교수를 파면한 것입니다.
사실상 감리교는 “교리적 선언”은 있으나 교리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신학이 다르다고 성직자를 파면할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와 계략이 신학자들을 희생시킨 것입니다. 변교수는 심장마비로 이미 세상을 떠났고 홍교수는 지금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목회하고 있습니다.
나를 더욱 놀라게 하고 분개하게 만드는 것은 이 파면사건에 직접 관여한 목사가 타교단의 두 친구 목사들과 낙시하러 바다로 나갔다고 합니다. 그 때 그 세 목사들이 변교수가 죽은 것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한 목소리로 떠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배에 동승하였던 교인이 자기가 다니던 서울에 있는 교회 목사에게 전하면서 하는 말이 “그들이 목사입니까!”라고 하였답니다. 참으로 한심한 착태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말을 그 목사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종교인이 신앙의 본질과 인간의 존엄성 보다 물질과 명예와 권력이라는 세속주의의 노예가 되면 이와 같이 해서도 아니 되고 할 수 없는 일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지금 우리는 위에서 말씀드린 사례를 우리의 개인생활과 함께 사회현실에서 날마다 너무나 많이 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지와 간계와 무책임이 난무하고 작당하는 부정과 불의와 부패의 장터에서 살아가고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생활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하느님 앞에서 반성하며 신앙의 본 궤도로 다시 돌아가는 신앙적 결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군중 속에 파묻혀 진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루머나 선동에 이끌리는 우를 범하기도 하고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자기의 교리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달리 주장하는 사람들을 모함하고 곤경에 처하게 만들 수도 있고 또한 빌라도처럼 진실을 알면서도 자기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진실과는 정반대되는 무책임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상황에 따라서 이 세 가지 역할을 모두 하고 있는 죄악의 집합체라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는 때도 있을 줄로 압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 당시의 민중과 유대교 지도자들과 빌라도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가담한 근본 동기와 이유를 깊이 깨닫는 일이 급선무일 것입니다. 그것은 문제의 핵심 곧 진실을 깊이 모르거나 무시한 것이 빚어낸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3년 간 예수께서 행하신 일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겉으로 나타난 현상만 보고 놀랐기만 했습니다. 군중들은 병을 고치는 것과 오병이어의 기적과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비판할 때 이에 호응하는 것을 보고 놀라며 위협을 느꼈습니다. 빌라도는 잡혀온 예수를 보고 ‘유대인의 왕’이란 존재가 그렇게 볼품도 없고 초라함에 놀랐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예수의 겉모습만 보고 놀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주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고 따르면 반드시 주님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어리석음과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은 ‘메시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구원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선동하는 소리에 놀아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뒤에 두고 자기의 욕망만 만족하려고 동분서주하는 군중이 되어서는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1950-60년대 한국적 부흥운동의 대명사는 박태선 장로의 신앙촌 운동이었습니다. 수십만의 군중이 모여 은혜도 받고 성령의 불도 받았고 불치의 병도 고쳤다고 떠들어대며 간증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모두 기증하고 덕소에 있는 신앙촌으로 들어갔고 많은 여인들이 이혼하고 그리로 들어갔습니다. 결국 껍데기만 보고 선동에 좌우되어 메시아를 따라 구원받으려고 갔던 사람들은 덕소 수용소의 노예가 되었고 신앙촌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매한 군중과 잘못된 지도자는 함께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신학생 때 제 어머니가 박태선 장로에게 매혹되어 원효로에 있는 그의 기도처에 새벽기도회를 다니곤 하였습니다. 나는 그가 어떤 신앙인인지 알고 어머니를 돕기 위해 어느 날 새벽에 어머니와 함께 그 기도처로 갔습니다. 박 장로는 열정적인 기도와 설교와 안수를 했습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나의 판단으로는 그의 행태가 기독교 신앙의 궤도에서 빗나갔다는 것을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그 날부터 어머니는 발 거름을 끊었습니다.
우리의 신앙 형태는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른 형식 안에 있는 내용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고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무지개의 색깔처럼 겸손, 이해, 인내, 관용, 희생, 책임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진리를 노치면 우리는 예수를 다시 재판하는 무리와 유대 지도자들과 빌라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은 하늘의 축복이고 또한 우리의 바른 선택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겉모습만 보고 따라다니지 말고 그의 말씀과 삶을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참 진리를 깊이 깨닫고 믿어야 합니다. 그 때 군중의 무지와 지도자들의 간계와 빌라도의 무책임에서 해방되고 참 그리스도인의 자격을 획득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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