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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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독교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성탄절입니다. 하느님을 배신한 죄로 죽음의 골짜기를 혜메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하는 축제의 날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교회는 이 날을 최대의 명절로 간주하고 잔치를 베풀어 왔습니다. 한 가정에 태어난 어린 아이의 돌 잔치도 정성을 다해 차리는데 하물며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가 탄생한 날에 큰 잔치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성탄일 12월 25일은 로마인들이 섬기던 태양신의 축제일이라고 합니다. 중세기 교회는 예수의 탄생일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호적을 위해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해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호적은 전해진 것이 없습니다. 로마인들의 태양신 축제가 어떤 모양으로 펼처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빛의 최고의 신인 만큼 그 규모나 화려함에 있어서 대단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따라서 교회도 성탄절을 최고의 축제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의 탄생기사를 보면 예수의 탄생은 그렇게 화려하거나 요란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동방박사나 하늘 천사의 등장은 성탄을 화려하고 환상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 자체는 매우 가난하고 소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인류 구원자의 모습이 나약한 어린 아이로, 여관 방이 없어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은 본래 화려한 축제가 아니라 그 부모 밖에 모르는 소박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물질만능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시대 속에서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축하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1. 예수는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도 가난한 곳이고 그의 집도 가난했습니다. 그가 목수의 아들이거나 또는 성서학자들의 주장 대로 농부의 아들이거나 간에 그런 가정에서 났다는 것은 가난을 타고 났다는 것입니다. 그의 가난은 물질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받을 수 있는 어떤 기득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도 바울처럼 로마시민권이나 가마니엘의 고등교육 같은 혜택도 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복음서 첫 머리에 예수의 혈통을 과시하기 위하여 그 계보를 따윗 왕에까지 소급해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주어진 기득권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만일 따윗의 혈통이 사실상 주어졌다면 그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지 아니하고 동방 박사들이 들렀던 헤롯의 궁전에서 태어나야 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의 가난은 세상적인 물질이나 특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과 같이 “마음의 가난”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인격에는 교만이나 욕망이나 간사함이 없고 그 대신 사랑과 겸손과, 관용과 이해만이 가득찼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로마 식민지 치하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기대처럼 기득권을 가진 지배자로 세상에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완전히 무장해제된 패잔병처럼 무기력한 존재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가난해지므로 가난한 자와 함께 할 수 있고 스스로 무기력해지므로써 기득권자들을 무력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빌립보의 말씀과 같이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지만 오히려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왕이 나타나는 모습과 하느님 나라의 왕이 오시는 모습이 다른 점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각에서 성탄을 볼 때 지금까지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축하행사가 초점이 어긋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예수를 부자 예수로 묘사하고 소박하고 조용해야 할 잔치를 지나치게 화려하고 요란하게 치르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태어난 곳은 냄새나는 마구간인데 지금 그를 모시는 곳은 화려한 궁전입니다. 예수는 가난하게 태어났는데 오늘의 교회는 지나치게 부자입니다. 그는 겸손한 아기로 태어났는데 그를 섬긴다는 사람들은 너무나 교만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물질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오늘의 교회에서 태어날 수 없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한국 교회의 현실이나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자세를 비난하고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기독교 공동체가 주인 없는 잔치를 차리고 하객들만이 흥겨워하는 것이 아닌가 반성해 보자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나심을 진정 축하하려면 그의 본래의 모습대로 우리도 스스로 가난하고 겸손해져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전 일간지에 “3억달러짜리 불행“이란 기사가 실렸습니다. 2002년 성탄절에 건설업자인 잭 휘태거란 사람이 미국 복권 사상 최대 액수인 3억 140만 달러짜리에 담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2년만에 쪽박을 차게 되었습니다. 단란한 가정은 풍지박산나고, 본인은 음주운전으로 체포돼 어 28일간 강제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교회 세 곳에 700만 달러를 기부하는 등 한 동안 겸손한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트립쇼 클럽과 카지노, 경마장에 발을 들어 놓으면서 2년 사이에 그 많은 돈을 다 탕진하고 설상가상으로 차에 두었던 54만 5천 달러를 도난당했다는 것입니다. 몇일전 일간지에는 그의 손녀가 살해되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그는 행운의 복권으로 벼락부자가 되었으나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비참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복권이 당첨되기 전의 본래의 가난한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제아무리 물량적으로 대박의 축복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마땅이 지녀야 할 가난하고 겸손한 예수의 모습을 잃어버릴 때 나타날 현상을 보여주는 경고성 메시지인 것 같습니다.

2. 예수께서 세상에 가난하게 오심은 무엇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려는 것입니다. 그가 가난하게 오심은 극빈자 보호 대상자가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가난한 자들에게 사람되는 길을 직접 가르치고 몸소 보여주려고 온 것입니다. 그는 가난한 죄인들이 바라는 세상의 물질과 지식과 권력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주체의식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사렛에서 자라고 그 동네가 속해 있는 갈릴리에서 짧은 일생을 보내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활동하였습니다. 갈릴리는 가난한 지역으로 주로 어부와 농꾼이 살았고 특히 그 당시 죄인이라고 낙인 찍힌 소외계층 곧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자랐고 그들과 함께 지냈으며 때가 찼을 때 그들에게 하늘의 복음을 전하고 참 사람의 길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 것은 사람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이었습니다. 인간은 동물이나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 인간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 인간이 제구실을 할려면 의식주의 문제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 인간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삶의 영원한 근거를 준 것입니다.
가난하게 오신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선포한 대가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세상의 부나 권력이나 명예가 아니라 바로 그 가난한 사람들과 권력자들에게 당한 배신과 아픔과 죽음이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틸리케는 말하기를 “예수가 태어난 말구유와 그가 매달려 죽은 십자가는 같은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가난하게 오신 분은 가난하게 살다가 결국은 가난하게, 오히려 비참하게 떠나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하고 겸손하게 오셨기 때문에 영원한 하느님의 사랑을 전달할 수 있었고 우리를 포함해서 지난 2천년간의 파란만장한 인간의 역사 속에서 무수한 인간들이 고난과 죽음 속에서 보람찬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규감이 되지 못하고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교회가 주려고 하지 않고 가지려는데 있습니다. 에릭 프롬의 말을 빌리면 존재지향적이 아니라 소유지향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제도적 교회와 인간의 영광을 위하고 가난한 자들 곧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면서 자기 구원에만 도취되어 있지 않나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려면 더욱 가난해지고 더욱 겸손해져서 받고 가지려는 욕망을 비우고 남에게 주려는 마음이 차고 넘쳐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는 가난하기 때문에 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을 비었기 때문에 세상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고 자기의 생명까지 바칠 수 있었습니다. 아니 그는 오히려 마음이 가난했기 때문에 하느님이 창조한 우주를 가슴에 품는 부자가 되었고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의 가난함은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목수의 아들이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 아니었고 돈이 없어서 가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원하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주변에는 그를 존경하는 부자도 있었고 그를 사랑하는 여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가난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스스로 택한 인격적 결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의 말씀처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려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가난을 선택해야 하고 세상을 섬기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와 권력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에 자기 부정과 생명의 희생이 가능하였고 하느님의 사랑과 의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 가난해지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GNP가 4% 성장에 그치고 전 세계에서 내년 경제에 비관하는 나라들 가운데 그리스가 63%로 1위이고 우리가 62%로 2위라고 합니다. 중국 등 몇 나라만 빼고는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경제적 빈곤에 대해 우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각성은 경제 자체의 문제로 가난해 지는 것이 아니라 경제 외적인 조건 곧 정치적인 실책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다고 하는 일반적인 인식에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게 되는 것이 누구의 책임이던 간에 우리의 긴박한 문제는 가난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없는 사람은 더욱 고통을 당하게 되고 돈 있는 사람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불안하니까 주머니를 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돈이 있지만 쓸 수도 없고 쓸 기분도 나지 않아 자연히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니까 국민 모두가 가나해지고 불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간난하게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는 가난함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비록 우리 사회의 간난이 정치인의 실책이나 기업가의 잘못이나 또는 과격한 노조의 책임 등 어디에 있던 간에 여기서 어떤 새로운 생각과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오늘의 가난이 타율적으로 주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처럼 자율적으로 가난에 대처할 수 없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가난해 진다는 것은 수입이 감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의미에서 검소한 생활, 겸손한 태도, 나누는 마음, 베푸는 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학자 몰트만은 말하기를 “가난한 사람만이 손을 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고 마음이 가난해 질 때 우리의 생각과 정신은 풍요해 지는 것이고 세상과 모든 사람들은 우리 가슴에 품을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연말과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 기관에서 모금운동을 버리고 있습니다. 해마다 수백억원을 모금하는 운동은 피상적으로 볼 때 대기업가들이 거금을 헌납하여 그 목표액을 달성시키기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코묻은 저금통을 비롯해서 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과부의 동전같은 것을 바치므로 거액의 목표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만들고 사랑을 만들고 살맛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율적이고 궁정적인 가난은 빈곤으로 얼룩진 세상을 풍요한 나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성탄절에 가난하게 오신 예수를 축하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궁합이 잘 맞아 떨어졌는지 모르겠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가난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이 간난을 사랑과 겸손과 나눔으로 전환시킨다면 우리 자신은 물론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도 따뜻하고 흐뭇한 성탄을 맞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가난한 예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길이고 우리의 가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을 이 시대에 전하는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가난한 성탄 2004. 12. 19, 26.
누가 2:1-7, 빌립보 2:6-11
이계준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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