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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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2:22~30, 33:8~11/요한일서 4:12~16
신반포교회 류성렬 전도사

1.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모 교회에 저보다 2년 아래의 자매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신학교 계열의 종교음악과를 지원하였는데, 그 학교가 수험생들에게 성경 시험 통과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그 자매는 당시 신학생이었던 제게 성경 과외를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후배였지만, 어쨌거나 제게 성경을 배운 제자였기에 늘 신앙적으로 잘 성장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안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자매가 환상 중에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자매를 불러 진위 여부를 물었는데, 그 자매는 확신에 찬 얼굴로 정말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너무도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했다며 신앙에 막 불이 붙은 듯 잔뜩 상기된 모습이었습니다.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진위 여부를 가리는 일은 불가능했기에 저는 그 자매의 환상을 그대로 인정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약간의 질투를 느꼈습니다. 당시 저는 제 또래의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교만에 가까운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기도 중에 예수님의 환상은커녕 천사의 날개 그림자도 보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자매가 정말 부러웠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환상과 종교적 황홀경을 체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방언이라든가 기도 중에 몸에 진동이 온다든가 하는 신비한 체험은 고등학교 때 일찍이 해 보았지만, 저는 그보다 더욱 확실한 예수님의 환상을 원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한 번 볼 수만 있다면, 그 누구보다도 확신 있고 열정적인 사역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까지 제게 단 한 번도 그런 환상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하느님의 얼굴을 영영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몇 년 후 초보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고 고향을 떠나 있는 제게 그 자매가 연락을 취해 왔습니다. 결혼을 하니 축가를 불러 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결혼식에 참석하여 축가를 불러 주었고, 참으로 오랜만에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자리에서 그 자매가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복적인 무속 신앙에 젖어 있음을 단번에 알 수가 있었습니다. 잘 살라고 축복해 주고 돌아왔지만 마음 한켠에서 이런 질문들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환상 중에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이 어떻게 그 체험을 헌신짝 버리듯 내 던질 수가 있었을까? 과연 그 자매가 본 것은 예수님의 얼굴이 맞았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 자매의 체험보다 더욱 가깝게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강렬하고 뜨거웠지만 그만큼 쉽게 변해버린 그 자매의 신비한 체험을 뛰어 넘어 우리 하느님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성서는 그런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제부터 오늘 읽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바로 이 주제, 즉 주님의 얼굴을 보는 법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2.
본문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꽤 많이 들으셨을 줄 압니다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요약해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형제였습니다. 쌍둥이였지만 장자권의 축복은 형 에서에게만 이어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을 잡고 태어날 정도로 지기 싫어하던 동생 야곱은 형이 사냥을 나간 사이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 앞에서 형 에서인척 행세하여 장자권의 축복을 모두 독차지해 버립니다. 형 에서가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하여 자신을 죽이려 하자 야곱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외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머나 먼 하란 땅으로 급히 피신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야곱은 갖은 고생 끝에 크게 성공하여 4명의 처와 11명의 아들, 1명의 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축과 재산을 이끌고 형 에서가 살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고향에 가까이 이르렀을 무렵 야곱은 자신의 형 에서가 4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자신을 맞으러 나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400명 정도의 인원이라면 단순한 마중 행렬이라기보다 군대에 가깝다고 판단을 한 야곱은 형의 분노가 아직 풀리지 않아 자신을 치러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는 형에게 줄 많은 선물들을 자신보다 앞서 출발시켜 미리 형에게 전달되도록 조치하고, 자신의 가족들과 가축들마저 먼저 개울을 건너게 한 뒤에 자신은 그 밤에 홀로 얍복 나루터에 남습니다. 이 때, 정체 모를 한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 다짜고짜 야곱과 씨름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야곱을 이기지 못하고, 야곱이 끝까지 그 사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자 그 사람은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어긋나게 만들었지만 끝내 야곱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절뚝거리면서도 그 사람에게 자신을 축복하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고 생떼를 쓰고, 그 사람은 결국 야곱을 축복한 뒤 야곱의 이름을 ‘하느님과 겨루다’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결국 야곱은 그 사람이 하느님, 내지는 하느님이 보낸 천사였음을 깨닫고 자신이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음을 기념하여 그 땅의 이름을 ‘브니엘’, 즉 ‘하느님의 얼굴’이라 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보게 된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저는 다음 두 가지로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방법을 제시하려 합니다.

우선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첫 번째 방법은, 홀로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 밤에 자신의 식솔들을 모두 먼저 건너보내고 홀로 나루터에 남았습니다. 날이 밝아 형을 만나면 죽을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임에도 야곱은 전투 준비를 시킨다거나 대책 회의로 밤을 지새운다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조용히 홀로 있기를 택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바로 거기서 그는 하느님과 만나 씨름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자신의 소유와 걱정거리와 생활의 여러 분주한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홀로 하느님과 독대하는 시간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복잡한 그물처럼 우리를 여기저기서 잡아당기고 있는 수많은 관계, 근심, 걱정, 분주함 속에서 우리는 가끔 ‘stop!’을 외치고 조용히 홀로 남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고독의 훈련을 통해 주님을 깊이 느끼고 자기 자신을 맑게 들여다보는 눈을 얻은 사람들만이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중세 영성 신학의 대가로 오늘날까지 많은 추종자를 갖고 있는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은 「영혼의 깊은 밤」이라는 매우 유명한 시에서 이렇게 고독의 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 인도하는 밤이여!
새벽보다 더 좋은 밤이여!
사랑하시는 분과 사랑받는 자를 연합시킨 밤이여!
사랑하시는 분 안에서
사랑받는 자가 변화되는 밤이여!

우리의 영혼에는 홀로 있는 밤이 필요합니다. 시인의 말대로 이 영혼의 깊은 밤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과의 연합으로 인도합니다. 이렇게 홀로 깊은 영적 명상의 샘에 잠김으로써 우리는 세상에 쫓기며 사는 삶이 아니라 세상과 자신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주님의 음성과 뜻을 깨달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와 같이 침묵과 멈춤 속에서 고요히 자신의 영혼의 깊은 밤으로 들어가 보는 영성 수련을 일컬어 ‘피정’(避靜)이라고 합니다. 한자 뜻 그대로 풀면 ‘고요한 곳으로 피한다’ 정도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카톨릭은 그나마 피정 수련이 이루어지지만 개신교인들에게는 생소한 편입니다. 하지만 피정 수련은 교파에 상관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저는 한때 잠시 수도 공동체에서 생활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이 피정이라는 것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일주일 동안 가슴에 ‘침묵’이라는 표시를 붙이고 다녔더니 누구도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공동체 내에서 하는 모든 작업에서 제외되었고 오로지 기도와 묵상, 성경 읽기, 강의 듣기, 명상에만 몰두하였습니다. 말을 하지 않고 철저하게 침묵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면서 저는 제 주변의 모든 만물들이 제게 많은 말을 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나 자신의 의견을 표시하기보다 철저히 듣는데 집중한 결과였습니다. 풀벌레 우는 소리, 식사를 나르는 사람들의 움직임, 밤하늘의 별빛, 심지어 유리창에 묻어 있는 먼지마저 저에게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나 자신을 낮추면 스승 아닌 것이 없다’더니 모든 이들, 모든 만물, 모든 사건들 속에서 주님의 속성을 발견해 낼 수 있었고, 그것들은 그 자체로 제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맑은 거울이었습니다. 그러나 피정이 끝나고 산을 내려와 세상에 몸을 섞어 보니 어느덧 그러한 감각들은 다 탁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홀로 있어 묵상하는 훈련은 한두 번 하고 마는 훈련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꾸준히 운동해야 하는 것과 같이 정기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생활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고, 사람에 치이다 보면 그렇게 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야곱의 상황을 한 번 보십시오. 대가족과 수많은 하인들과 엄청난 양의 가축들의 여행길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내일 아침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다급한 밤이었습니다. 얼마나 불안하고 얼마나 분주하고 얼마나 마음이 복잡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러한 다급함, 두려움, 분주함 속에서 우왕좌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침묵하며 홀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밤이 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했습니다. 브니엘, 그 얍복 나루터에 새벽이 동터오고 저 멀리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을 때 야곱은 영혼의 외로운 밤을 비로소 끝내고 절뚝거리며 자신의 현실로, 가족에게로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 고독의 밤, 하느님의 얼굴을 보기 전에 가졌던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에 하느님의 얼굴을 본 후 새로 얻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이 홀로 산에 올라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는 구절을 여러 차례 발견하게 됩니다. 병정들에게 잡혀 가시던 바로 그 밤에도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홀로 계셨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동산에 올라가셨지만 돌 하나 던질 만큼의 거리를 떨어져 홀로 기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죽음 앞에서 주님은 홀로 영혼의 어두운 밤을 거닐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쁠수록, 분주할수록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주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지려 노력해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두려울수록 더욱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일찍이 갈파했듯이 우리 각자는 ‘신 앞에 선 단독자’입니다. 우리는 홀로 주님과 대면해야 합니다. 그 분의 얼굴은 그렇게 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 분과 씨름합니다. 10년, 20년, 아니 평생을 교회를 다녀도 주님과 홀로 씨름하려는 이러한 시도가 없다면 우리는 그저 주님의 얼굴을 희미하게 볼 뿐일 것입니다. 홀로 있어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두 번째 방법은,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방법이 ‘홀로 있는 것’이었는데, 두 번째 방법이 ‘더불어 있는 것’이라는 저의 말에 헷갈려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 틀린 말이 아니며, 서로 배치되는 말도 아닙니다. 일단 야곱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날이 밝고, 간밤에 나루터에서 하느님과 씨름했던 야곱은 드디어 형 에서와 만나게 됩니다. 야곱은 형 에서 앞에서 일곱 번이나 엎드려 절하였고, 에서는 걱정했던 바와 전혀 달리 야곱을 끌어안고 울며 입을 맞추었습니다. 형제간의 반목과 두려움이 사라지는 화해의 순간이었습니다. 20년간이나 계속 되어 오던 미움과 원망, 죄책감과 두려움의 사슬이 끊어지고 눈물과 용서와 화해의 감격이 넘쳐나는 바로 이 장면에서 야곱이 한 말에 우리는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33장 10절에서 야곱은 형 에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뵈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

야곱의 입에서 놀라운 고백이 나왔습니다.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던 그 무서운 형님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지난 새벽 얍복 나루에서 홀로 남아 하느님을 만나고 그 땅의 이름을 ‘하느님의 얼굴’이라는 뜻의 ‘브니엘’로 붙였던 야곱이 이제 자신의 형과 더불어 화해하는 그 순간에 또 다시 ‘하느님의 얼굴’이라는 말을 꺼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홀로 있을 때 하느님의 얼굴을 만났고, 곧 이어 다른 이와 더불어 있을 때 하느님의 얼굴을 다시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하느님 얼굴의 두 가지 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개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만나 주시는 하느님과 공동체의 삶과 나눔 속에 보여 주시는 하느님은 서로 다른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야곱처럼 밤에 실존적 하느님을 체험하고, 낮에 공동체적 하느님을 체험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어쨌거나 야곱은 형님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같은 땅을 밟고, 같은 공기를 마시는 사람들 속에 당신의 형상을 심어 놓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존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고갱의 작품 중에 「마리아」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살펴보면 왼쪽에는 날개 달린 천사 가브리엘의 모습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보입니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이 모든 등장인물들, 심지어 마리아와 아기예수마저 모두 타히티 원주민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타히티에 머물렀던 고갱은 자기가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마리아와 예수의 모습을 발견해 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두 번째 성서 봉독문은 요한 일서 4장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이러한 관점, 즉 더불어 함께 사랑을 나누는 주변 사람들 속에 하느님의 형상이 숨겨져 있음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 요한 일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16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끈으로 연결된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 공동체 속에, 서로의 얼굴 속에 하느님은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형 에서와의 관계 가운데 용서와 화해가 성립되자 형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의 끈으로 묶여질 때 서로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형상,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타성에 젖어 쇠락의 길로 접어든 한 오랜 수도원이 다시 활기를 되찾은 전설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수도원을 다시 일으키고자 고심하던 수도원장은 매우 지혜롭다는 한 현자를 찾아가 수도원을 부흥시킬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현자는 대답하기를 “죄송합니다. 전 아무런 조언도 드릴 수 없군요. 하지만 제가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당신들 가운데 분명히 메시야가 계시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수도원장으로부터 현자의 말을 전해들은 수도사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동료들 중에 메시야가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대할 때 ‘저 사람이 사실은 메시야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를 대할 때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되었고, 자신을 겸손히 낮추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원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지게 되었고 마침내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신반포 교회도 서로를 대함에 있어 이렇게 깊이 존중해 주는 분위기가 깊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졸리신 분들 잠도 깨실 겸 옆에 앉아 계신 분들과 이렇게 인사를 한 번 나누시기 바랍니다. “당신을 보니 하느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혁명적인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가 옆에 앉아 있는 교우 한 사람, 내 이웃 한 사람, 내 직장 동료 한 사람, 굶주리고 헐벗은 불우한 이웃 한 사람에게 행한 일이 곧 하느님께 행한 일과 같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싶으십니까? 우리의 이웃들을 보십시오. 사랑 안에서 그들을 바라보십시오. 그 안에 하느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더불어 있음에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3.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의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모두에 말씀드렸던 그 자매처럼 신비한 환상 중에 한 번 짜릿하게 경험하는 전기 충격 같은 차원의 체험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리자면 첫째, 철저히 홀로 있어 하느님과 기꺼이 씨름할 준비가 된 자는 만져지고 느껴지는 모든 만물과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으며, 둘째, 사랑 안에서 이웃과 더불어 있기 원하는 자는 우리의 모든 이웃과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의 모습 속에서도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 회퍼 목사님은 「Life Together」(함께 사는 생활)이라는 책을 쓰시면서 한 챕터의 제목을 “함께 있는 날”이라고 짓고, 다음 한 챕터의 이름을 “홀로 있는 날”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는 이 두 가지가 불가분의 관계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함께 있는 날’과 ‘홀로 있는 날’은 영적 성공을 위해 둘 다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본 회퍼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홀로 있기가 없이 친교를 원하는 사람은 공허한 말과 감정에 빠진다. 그리고
친교 없이 홀로 있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공허한 깊은 수렁과 자기도취와 절망
에 빠진다.

만약 우리가 어느 한 쪽만 강조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입체적 얼굴을 보지 못하고 하나의 단면만을 줄기차게 보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수직적인 영적 소통에만 집중하는 사람이나, 하느님과의 실존적 대면 없이 관계 중심의 신앙생활만 고집하는 사람은 모두 바람직하지 않은 신앙의 모델이라 할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 되는 것 같으나 반대 되지 않는 강조점들입니다. 마치 우리가 걸어갈 때 반드시 한 발은 떠 있고, 한 발은 지면에 닿아 있는 형태가 교차 반복되어야 전진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두 발 모두 땅에 닿아 있거나 두 발 모두 공중에 떠 있다면 우리는 걸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홀로 있기’와 ‘더불어 있기’는 이와 같이 끊임없이 교차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건강한 신앙이며 발전적으로 전진하는 신앙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심을 기다리는 이 강림절기에,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셔서 우리가 눈을 들어 보기를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능히 바라볼 수 있는 하느님의 얼굴을 홀로, 또한 더불어 함께 발견하여 ‘진리가 참으로 우리 가운데 와 있었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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