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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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마태복음 5: 23-24; 누가복음 23: 32-34

2007. 10. 7. 신반포교회, 손원영 목사



1.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불교용어로서 화엄경에 나오는 말이라고 하는데, 이판승과 사판승이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판승(理判僧)이란 이치 이(理)자를 써서,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탐구하는 승려를 말합니다. 참선을 한다든지 혹은 불경을 연구한다든지 해서, 진리를 찾아 공부하는 승려를 말합니다. 공부하는 승려라고 해서 공부승이라고도 부릅니다. 반면에 사판승(事判僧)이란 일 사(事)자를 써서, 사찰을 관리하는 승려를 말합니다. 사찰의 행정업무를 본다든지, 시주를 관리한다든지 하는 승려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대로 된 사찰이라면 이판승이 많아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사판승이 많아야 하겠습니까? 제가 이런 질문을 대학원 학생들에게 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당연히 사판승이 많아야 하지요. 그래야 교회가 부흥할 꺼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원칙은 8:2 정도로 이판승이 많아야 합니다. 그래야 절이 절다워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판승 역할이 쉽지가 않습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하얀 벽을 바라보고 참선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어려운 한자공부를 하면서 불경을 연구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대신에 사판승은 겉보기에 얼마나 좋습니까? 시주 돈을 관리하면서 돈 냄새를 맡을 수 있지요, 좋은 승용차 타고 시내구경도 할 수 있지요, 사람들 만나면서 만난 것 먹을 수도 있지요, 등등. 그래서 공부하고 참선하는 것 대신에 너두나두 사판승 하겠다고 나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판승과 사판승의 비율이 8:2가 되어야 이상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반대로 역전되어서 열의 여덟이 사판승 하겠다고 할 때, 뒤죽박죽이 되었다 혹은 막 나간다라는 의미에서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모습을 일컬는 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판승과 사판승이라는 말은 사실은 우리 교회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교회도 제대로 된 교회라면, 사판성도 사판목사보다는 이판성도 이판목사가 많아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또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이판성도, 쉬지말고 기도하고 묵상하며, 자신의 영성을 수련하는 성도, 이런 이판성도가 많아야 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저는 가끔 기독교신문을 보면, 참으로 낯 뜨거운 광고를 종종 보게 됩니다. 교회연합행사에 관한 광고인데, 왜 그리 회장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증경회장, 총회장, 대회장, 명예회장, 협동회장, 상임회장, 공동회장 등등, 그 각각이 어떻게 다른지도 잘 모르겠고, 또 왜 그리 감투를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총무의 종류가 참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행총무, 협동총무, 상임총무, 공동총무 등등...한국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판성도는 줄어들고, 돈과 직함에 관심을 두는 사판성도, 사판목사만이 늘어나는 것 같아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교회의 목사인 저는 이판목사입니까? 아니면 사판목사입니까? 저도 요즈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수도자의식을 갖고 열심히 예수의 도를 닦고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판성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사판성도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우리교회도 하나의 조직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교회를 관리하고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사판성도분들이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잘 운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존재이유는 엄밀한 의미에서 행정업무가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그리스도의 도를 닦는 수도공동체에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 간에 사랑을 나누는 친교공동체,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섬김의 공동체에 그 존재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점에서 우리 자신을 반성했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나는 이판성도답게 열심히 예수의 도를 닦고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2. 


그렇다면, 우리가 이판성도로서, 우리는 무엇을 닦아야 할까요? 어떤 도를 닦아야 할까요? 오늘 그 이야기를 좀 여러분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의 무엇을 닮으려고 지금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예수의 도를 닦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지금 여러분은 예수의 무슨 도를 닦고 있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요즈음 “용서”라는 말에 관심을 좀 많이 갖고 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23장의 본문은 바로 우리가 닦아야 할 예수의 중요한 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용서”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로마의 군인들을 측은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옷을 벗긴 뒤 그 옷을 갖기 위해 제비를 뽑고 있는 그 군인들을 미움이 아니라 안타까움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를 비웃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예수의 위대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흔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자신의 그 말씀을 몸소 십자가 위에서까지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언행일치의 모습입니까? 얼마나 위대한 사랑의 실천입니까? 저는 예수의 이 모습을 묵상하면서, 정말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에 비해, 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작게 느껴지는지 새삼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도를 닦는다고 할 때, 바로 그 용서의 도를 닦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요즈음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요즈음 “용서”의 도를 닦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 전 저는 책을 하나 읽었는데, Lebacqz & Driskill이란 분이 쓴 Ethics and Spiritual Care (2000)라는 책입니다. 이 책 내용 중에 “spiritual abuse”란 용어가 나옵니다. 직역하면, ‘영적 학대’라는 말인데, 전 이 용어를 접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아동학대니 성학대, 성폭력이니, 혹은 신체학대, 동물학대 하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영적 학대라는 말은 잘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학대란 힘이 있는 자가 힘이 없는 자를, 혹은 권력을 갖고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몹시 괴롭히거나 가혹하게 대우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영적 학대란 종교적으로 권위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언행으로 괴롭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목회자가 평신도를, 혹은 장로나 권사가 초신자에게 종교적인 구실로 상처를 준다면 그것은 영적 학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에 의하면, 지금 교회에서 혹은 사회에서 영적 학대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예배 중 설교시간에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저주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주일성수를 잘 하지 않는 신도에게, 혹은 목회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분명 영적 학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또 몸이 아픈 성도에게, 그렇게 몸이 아픈 것은 죄 때문에 하느님의 벌을 받아서 그렇게 아픈 것이니 빨리 죄를 고백하라고 한다면, 그것도 일종의 영적 학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예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욥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까닭 없이 재산을 다 잃고, 또 사랑하는 자녀들도 다 잃고, 또 자신도 병이 들어 신음하는 욥에게, 그의 친구들이 위로한답시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와서 하는 말이, “네가 죄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까 빨리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들은 욥은 억울해 하면서,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나는 결백하다고 말입니다. 바로 욥은 친구들로부터 영적 학대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영적 학대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영적 학대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혹 저도 여러분을 영적으로 학대한 것이 없나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혹 있다면, 이 시간을 빌어서 여러분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사실은 저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꽤 영적 학대를 당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교회가 좀 진보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방 목회자들 중에 저를 보면 좀 이상한 눈빛을 보내며 부당하게 대우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당신네 교회도 교회냐고 하면서... 말하자면, 이것은 저나 여러분이 일종의 영적 학대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 많고 교인수가 많은 소위 부흥했다는 교회들이 우리같이 그렇지 않은 교회들을 업수히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영적 학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제가 몸담고 있는 대학은 좀 보수적인 학교입니다. 그래서 제가 연세대학교에서 소위 신 신학을 공부했다고, 그래서 신 신학자라고 가끔 저에게 협박하고 비난합니다. 일종의 영적 학대이지요. 사랑하는 여려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혹 영적 학대를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여러분이 교회에 좀 오래 다녔다고 해서, 여러분 보다 짧게 교회생활하신 분들을 무시하면서 혹 영적으로 학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요즈음, 기도거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저에게 영적으로 학대하는 사람들을 그래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텐데, 정말 할 수 있는지 그것이 제게 기도거립니다. 분명히 예수의 제자라면, 그들을 측은히 여기면서 용서를 실천해야 할텐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정말로 용서했는데, 과연 나는 어떤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3. 

저는 최근 영화를 한편 봤습니다. 실은 오래전에 개봉된 영화인데, 미루고 있다가 귀국한 뒤 큰마음 먹고 DVD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창동감독이 만든 <밀양>이라는 영화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많이들 보셨을 텐데, 혹 아직도 못 보신 분이 있다면, 꼭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주연을 맡은 전도연씨가 칸영화제에서 상도 탔고, 올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화로 추천되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 영화는 신애라는 여자가 주인공인데, 그는 남편을 잃고 실의에 빠진 나머지, 초등학생 아들 하나를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가서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며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내용은 모두 거두절미하고,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생명처럼 소중한 아들이 그만 돈을 요구하는 웅변학원 선생에게 납치되어 살해된 것입니다. 그 사건으로 신애는 완전히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교회에 나오라는 전도를 받게 되고, 그녀는 교회를 찾습니다. 그리고 부흥회에 참여하고, 또 교인들과 사귀면서 소위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에 나오는 대로, “원수를 용서하라”라는 말씀에 따라 자기 아들을 죽인 웅변학원 선생을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고, 형무소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합니다. “내가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위로를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은혜로 이렇게 내가 당신을 용서해 주러왔노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살인자는 오히려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마치 당신의 용서가 필요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은 나도 감옥에 들어와서 하느님을 믿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에 평화를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신애는 기가 막혔습니다. 무릎을 꿇고 빌면서 용서해 달라고 애원해도 해줄까 말까 고민할 판인데, 그는 하느님이 이미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당신의 용서가 필요 없다는 듯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신애는 그만 그 자리에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뛰쳐나와 이렇게 외칩니다.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았대요. 근데 내가 어떻게 다시 그 사람을 용서하냐고요!!” 신애는 그만 완전히 미쳐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이 영화는 우리 기독교인의 잘못된 용서관을 날카롭게 비판한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진정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용서가 무엇인지 우리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아주 유익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 아니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화 속에 나오는 살인자처럼, 그렇게 나의 죄를 하느님에게서 용서받았으니 당신의 용서가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태도입니다. 이창동감독은 그것을 예리하게 포착해서 기가 막히게 영화화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문제에 관해서 성서는 어떻게 말합니까?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원한을 품고 있다고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 5:23-24) 여러분, 이 말씀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먼저”입니다. “먼저 가서 네 형제와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예배를 드리고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기 전에, 먼저 사람에게 용서를 빌라는 말씀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지금 살인자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애에게 먼저 용서를 구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은 채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하면서 혼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라고 이창동감독은 영화를 통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몇 주 전, 정진홍 교수님께서 오셔서 특강을 잘 해주셨는데, 그분 예화를 기억하십니까? 정교수님 친구 중에 사업하는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가 그만 부도가 나서 어려움을 당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한푼두푼 모금을 해서 자녀들 등록금도 대주고, 또 형무소에 들어가 있는 친구를 위해 변호사 친구는 변호도 해주고 해서 다행히 잘 일이 해결되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런데 연말에 동창들이 모였을 때, 그 친구에게 한마디 하라고 하였더니, 그 친구 하는 말, “하느님께서 도와주셔서 자녀들이 학교를 잘 다니게 되었고, 하느님이 도와주셔서 자신도 감옥에서 잘 나올 수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다”고, 그러면서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그냥 들어갔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동창생들은 그 친구를 향해 하나같이 “***”이라고 욕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도와준 동창생들에게 고맙다는 말, 왜 그 말을 못합니까?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친구들에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그런 뒤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용서에도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마 6:12) 이 구절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순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 우리에게 영적으로 학대한 사람을 먼저 용서하는 것이 먼저라고 예수께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누구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에게 먼저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것이 먼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다음, 하느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에 나타난 예수의 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물론 순서가 바뀌었다고 해서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시겠지만, 적어도 사람들은 우리를 용서해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했다면 그의 죄를 먼저 용서해야 하고, 또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먼저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 순서를 잊지 맙시다.



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닦는 신앙공동체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이판성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도를 닦는 성도 말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는 예수의 도 중 용서의 도를 생각했습니다. 용서, 그것은 위대한 예수의 도입니다. 그 길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지만, 생명의 길이고, 영생의 길입니다. 그 길이 예수처럼 사는 방법입니다. 우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또 내가 잘못한 사람에게 찾아가 먼저 용서를 비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순서를 지켜서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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