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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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18-22 / 마가복음 1:1-8

신반포교회 이계준 목사

 

1.

 인간의 역사는 패션의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하느님에게 반역한 다음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신화는 원시인들의 패션의 출발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 인간의 주거, 의상, 가제도구 및 심지어는 생각이나 가치관까지 인간의 삶 전체가 시대와 개성에 따라 그 형태와 모양이 변해 왔기 때문입니다. 요즘 대학의 인기학과 중에 하나는 그래픽 디자인인 것 같은데 제가 이 방면에 무식하지만 이것은 결국 인간생활 전체를 새롭게 도안하는 작업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우리가 추구하는 패션 가운데 가장 큰 관심사는 옷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왜 옷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입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미를 추구하는 동물인 동시에 시대에 따라 고유한 멋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20세기 중반에 가난한 시절에는 패션이 무엇이고 멋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그것은 외국인들이나 또는 일부 상류계층의 흥미꺼리에 속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패션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과 자기다움을 제공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2년 전에 미국에 있으면서 보니까 미국 사람들보다는 한국 사람들이 패션 감각이 더 예민하고 발달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서울 사람들의 패션을 보면 서울인지, 뉴욕인지, 파리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하이 패션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고가의 의장과 함께 최신의 모델을 즐기는 모습을 어디서나 발견하게 됩니다. 가끔 백화점에 아이쇼핑하는 사람의 뒤를 따라 다니면 상상을 초월하는 패션을 구경하면서 시간과 상상의 광속도를 느끼곤 합니다. 또한 어떤 모임에 가면 마치 패션쇼인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데 옷걸이는 시원치 않지만 세계적인 브랜드가 걸려 있는 것입니다. 가장 매력적인 패션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값이나 브랜드에 관계없이 개인의 취향과 몸매와 상황에 잘 어울리도록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상이란 우리의 경제적인 조건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의 생각과 삶의 철학에 직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철학자 토마스 카라일이 그의 의상철학에서 자연이 최고의 패션인 것은 그것이 신의 옷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한 말은 패션에 대한 최고의 정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패션 디자이너인 앙드레 김은 스스로 흰옷을 만들어 입고 다니는데 그의 모습과 체격에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때 옷 로비사건으로 국회 청문회에 나타나서 자기의 본명이 김복남이라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그 사람과 옷은 생판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름이 인격과 관계는 없겠지만 그런 느낌을 준 것을 보면 이름과 인품과 옷의 상관관계도 없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1970년대의 일이지만 우리가 화곡동에 살 때 어떤 사람이 여행 다녀오면서 부인에게 일제 녹색 코트를 선사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젊은 주부들이 일본에 출장 가는 남편들에게 녹색 코트를 주문하여 온 동네가 녹색 코트로 도배한 일대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일제와 고가의 패션만 생각했지 자기의 개성은 발달하지 않은 시대이었으므로 그런 웃기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요즘은 기업의 다품종 소량생산이란 경영전략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의 취향에 따라 옷을 선택하니까 같은 제품을 걸치는 사람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결국 우리의 최고 패션이란 자신의 주체성의 문제인데 우리 교우들은 모두 이 점에서는 최고의 패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매우 독특한 옷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둘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창의적인 패션이 아니라 구약시대에 예언자들이 입었던 전통적 의상이라고 합니다. 그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예언자라고 자처하였으므로 예언자의 옷차림을 한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참회를 촉구하면서 거친 광야에서 활동하는 예언자이니 만큼 궁전이나 부잣집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거나 값진 옷보다는 야생적이고 검소한 옷차림이 더 적절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등산할 때 신사복에 넥타이를 매거나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지 않고 점퍼와 면바지에 등산화를 신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한의 패션은 그의 입장과 활동과 상황 등 삼위일체가 잘 조화되는 최고의 패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패션에 관해서는 성서에 어떤 기록도 없습니다. 다만 그의 생활 주변을 참작해서 어떤 개성적이고 독특한 옷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는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도 아니었기 때문에 종교인들의 옷을 입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고 부자의 화려한 옷이나 로마 관리의 관복도 걸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아마도 일반 유대인들이 입는 평범한 옷과 다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주로 일반 유대인들, 특히 갈릴리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가까이 하는 것이 그의 인생철학이고 일상생활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입는 옷과 흡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로마 군인들이 그의 옷을 나누어 가진 것을 보면 과히 초라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옷이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평민수준에 그쳤지만 그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그를 따르던 무리가 그에게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오랜 동안 기다리는 메시아 곧 하느님의 임재를 예수에게서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한다면 사람들이 하느님이 인간의 옷을 입은 예수 안에 입재하심을 본 것이고 또한 하느님의 영광스런 존재가 그의 평범한 옷을 뚫고 밖으로 표출되었다는 것입니다.
 20세기 후반에 “성의”라는 영화가 있었지만 예수의 옷은 성의라고 부를 정도로 권위나 위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느님을 만났고 그분 안에 하느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의 옷은 성의 곧 거룩한 옷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옷이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옷을 규정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성서에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에 대한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셉의 아들, 나사렛 사람 등 인간적인 명칭도 있으나 그를 신격화시킨 명칭이 오히려 많은데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임마누엘, 인자 등이 그것입니다. 이렇듯 신적인 이름이 나타나게 된 것은 그의 부모나 예수님 자신이 그런 이름을 지운 것이 아니라 그를 만나고 함께 생활한 제자들과 추종자들과 성서의 저자들이 구약성서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 명칭들을 인용하여 예수님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름들은 가짜 박사처럼 내용이 없는 허구적인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제자들과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말씀과 삶과 고난을 통해서 그의 인간성의 옷을 뚫고 흘러나오는 초월적인 영적 능력에 충격을 받고 그것에 감동되었고 그런 이름들을 인용하여 그가 어떤 분인지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검소한 패션을 통해 흘러나오는 영적 충격이 얼마나 강렬하였는지는 열두 해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경우를 보면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옷 술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별로 좋은 옷도 아니고 위엄도 없는 평범한 옷자락이고 더욱이 무더운 중동지방에서 세탁기도 없는 시대이므로 예수의 옷에서도 땀내가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거기서 우러나오는 영적인 힘을 발견하고 거기서 구원의 열쇠를 찾았던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천의 패션은 어떠해야 하겠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가 어떤 패션을 즐기던지 관계없이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천의 인격이 우리의 옷을 통해 배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옷이 김복남 보다는 앙드레 김에 맞듯이 우리의 옷이 이계준이라는 이름보다는 그리스천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난 8월 20일자 모 일간지 아침 논단에 “내 이름 석자가 ‘브랜드’”란 최인아 씨의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명품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생활에 필요한 온갖 명품들을 갖기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른다고 합니다. 근자에 한국과 아시아에 이 명품 소비 열풍이 일어나서 이것을 ‘럭스플로전’이라고 하는데 영어의 명품이라는 luxury와 폭발이라는 explosion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이 칼럼은 결론적으로 우리는 각자가 자기의 이름 석자를 명품 브랜드로 만들어야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대학을 나오고 거의 비슷한 수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서 명품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전문 분야에서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을 한평생 배양해야 명품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느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명품이 되기 위해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같은 명품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나치에 희생된 본회퍼 목사의 말처럼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존 스퐁 감독은 예수를 완전한 인간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처럼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 인격과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인간이란 다름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초기 추종자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게 된 동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크리스천 동기도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명품을 만드는 작업은 단시일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 “밀양”의 여주인공처럼 짧은 신앙생활을 통해 구원받는 명품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어떤 종류의 명품이던 간에 명품이란 것은 장기간 해산의 고통을 통해 당대에 이루어지는 것도 있으나  대를 이어가면서 그 이름과 가치를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크리스천 패션도 그런 차원으로 업그레이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명품이 되거나 명품 회사를 만든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국민은 명품 대통령을 선출하려고 학수고대하고 있는데 스스로 명품이라고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명품 같기는 한데 흠집이 너무 많아 명품 값을 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국 불량품을 선택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스스로 크리스천 명품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목사나 평신도들 할 것 없이 무수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국내외적으로 내놓을만한 명품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20세기 초기에 기독교와 크리스천은 민족의 희망이었고 근대화에 선구자이었으며 사회의 개척자로써 명품의 진가를 보였습니다. 여기서 안창호, 이상재, 함석헌, 김재준, 한경직같은 크리스천 명품이 생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와 크리스천은 그 수가 제아무리 많고 세계 제일의 명품이라고 외쳐대도 우리만 빼고는 세일이나 폐기 목록에 올라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과제가 있다고 봅니다. 명품이란 대중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소수만이 즐기고 소수만의 사랑을 받는 제품입니다.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제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려고 하지도 않거니와 비록 소유한다고 할지라도 그 진가를 알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 명품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대중적인 패션을 제조하는 것이 아니라 명품 패션을 제조하려는 교회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만이 가지는 특성은 우리의 신학과 예배와 선교와 생활에 깊이 배어서 순수하고 승화된 크리스천 패션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불란서의 사회사상가 알랭 투랜은 서구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면서 이를 극복하는 길을 제도 중심에서 개인의 권익과 그것을 쟁취하려는 주체성 확립에 있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오늘날 기독교 이후 시대에 교회가 직면한 위기 속에서 우리가 크리스천 명품 곧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는 길을 각 사람이 예수의 신앙을 이어받아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지성적으로 완성된 패션을 능동적으로 창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미술학도처럼 명품인 예수의 모델을 놓고 개인적으로, 공동적으로 크리스천 패션을 함께 창조하는 공장이고 목회자들은 여러분들과 창조적 작업에 동참하고 돕는 팀장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환경이 가짜와 위선과 거짓 명품 패션으로 만연하고 그것에 대한 유혹과 야합이 손짓하는 현실에서도 주체적인 크리스천 패션 창조에 헌신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영원한 현재 곧 하느님의 현존에 진입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자기 나름대로 최선으로 만든 크리스천 명품을 지향하면서 영원한 기쁨과 위로와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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