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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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14-17/ 베드로전서 4:7-11

신반포교회 이계준 목사

 

 금년 한 해도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해의 낙조를 바라보며 지난 일들을 생각하고 스스로 이룩한 것들을 추려봅니다. 시간과 열정과 생각 모두를 투입해서 살아온 한 해를 결산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신생활 곧 신앙생활의 득실을 따져보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그보다도 신앙생활이란 우리 삶의 중심이고 기둥이기 때문에 지난 한 해 동안 우리가 살아온 신앙생활을 반추해보는 것은 가장 중요하고 새해의 활기찬 삶을 위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1.

 저는 지난여름 미국에서 대학교수이면서 소설가인 오승제 씨의 단편 “신 없는 신 앞에”란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 소설에는 평신도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정혜란이란 여인으로서 본래 간호사이었는데 결혼 후 다방을 경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새벽기도회에서 큰 은혜를 받은 다음 교회출석과 헌금에 적극적인 열성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을 믿으면 인생과 사업이 소원대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아주 소박한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더욱이 다방에서 성가곡과 찬송가를 틀며 전도하면 사업에 성공하리라고 믿으며 그렇게 하다 망하더라도 좋다는 극히 보수적 신앙인입니다.
 둘째 인물은 정혜란의 남편인 미술가입니다. 그는 현대적 예수를 그려보겠다고 100호 짜리 캔버스를 화실에 놓고 3개월 째 붓을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한 때 교회에서 중고등부 교사이었으나 이제 교회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고 교회에 출석도 하지 않으면서도 화실에는 성경과 신학 및 철학 서적을 쌓아놓고 있습니다.
 그는 아내의 기복신앙과 제도적 교회를 비판하고 목사의 기도의 효력과 이원론적 신앙을 부정합니다. 그는 기독교의 허구적이고 위선적인 요소를 제거하려 하고 교회가 주장하는 하느님을 부정하면서도 자기 나름의 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역사상 기독교인은 단 한 사람뿐인데 그는 십자가에 달렸다”고 갈파한 니체에 동감하는 냉소적 신앙인입니다.
 세 번째 인물은 임박사라는 정형외과 의사입니다. 그는 정혜란의 첫 사랑이자 결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피해 미국으로 가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혜란이 다니는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염치 불구하고 혜란의 다방에 자주 들리면서 성가곡과 찬송가를 트는 것에 반대하고 신앙토론도 합니다. 혜란은 임 장로의 애매한 신앙상태를 보고 교회에 다니는 이유를 묻습니다. 그는 세상의 환락과 교회의 경건을 모두 소유하기 위해 교회를 다닌다면서 이중 인격적 신앙을 솔직히 토로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생의 고민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신앙형태는 구구각각입니다. 정혜란은 순수하고 진지하지만 보수적 광신주의자에 속하고 그의 남편은 현실을 부정하는 냉소주의자인 동시에 나름대로 하느님을 추구하는 철학적 구도자라고 한다면 임 장로라는 사람은 극히 현실주의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인으로써 예수의 복음을 왜곡하고 교회에 대한 세간의 비난을 자초하는 사람입니다.
 소설이란 일종의 창작이기 때문에 사실과 다르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작가의 생각이나 경험을 상상력을 통해 승화시킨 것이므로 이 소설은 오늘날 한국교인들의 신앙 패러다임을 셋으로 구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셋 중에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보수주의일 것이고 소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현실 교회에 염증을 느끼고 교회를 떠나 철학적 신앙을 추구하거나 또는 위선적인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 가지 패러다임 중에 어느 것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여러분들은 어느 것도 자기에게 해당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이 신앙형태들은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 패러다임은 어떤 것이고 그것을 추구하고 실현하기 위해 지난 한 해 얼마나 시간과 열정과 생각을 투자하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저는 우리 신앙을 본질적으로 또한 실천적으로 가늠하는 본문 두 구절을 선택해서 그것을 잣대로 우리의 신앙 형태를 스스로 검토하고 결산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2.

 첫째로 마태복음 9:14-17의 말씀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을 때 주님께서 대답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와 제자들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비유하시면서 신부가 신랑과 함께 있으니 금식할 것이 아니라 잔치를 벌여야 하고 신랑이 떠나가면 그 때는 슬퍼하며 금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시 포도주와 가죽 부대 비유로 바뀌면서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잘 보존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의 본질 곧 예수와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근본 원리를 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용납하지 않는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과거 지향적이고 제사 종교적 형식인 금식을 하지만 우리는 지금 주님의 말씀과 생명 가운데서 동거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이어트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금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 낡은 형식에 고착될 것이 아니라 항상 생동적이고 발전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생명은 영원히 새로운 것이므로 가죽 부대인 우리 신앙인도 항상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금년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무런 질적 변화나 발전이 없어서 마치 낡은 가죽 부대처럼 되었다면 우리 안에 있는 새 포도주가 숙성하면서 낡은 부대인 우리의 신앙형식을 파괴하여 복음은 버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금년 초에 우리가 새로운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었다면 그 포도주가 잘 숙성해서 잔치에 내 놓을 만 한지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포도주 값은 물 값 정도에서부터 금값 정도까지 다양합니다. 그것은 포도주의 질에 따라 값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포도주 값은 얼마인지 검토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신앙인으로 살면서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고 영적 생활에 충실했는지, 복음의 말씀을 신학적으로 또한 지성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는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을 인격과 삶에 적용하려고 고민했는지 스스로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베드로전서 4:7-11의 말씀은 종말이 가까이 오고 있는 때에 믿는 자들이 실천해야 할 생활방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가운데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인간적 관계와 함께 각자가 지닌 능력을 가지고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길이라고 합니다.
 금식과 새 포도주의 비유가 신앙생활의 원리에 관한 말씀이라면 베드로전서의 본문은 신앙생활의 방식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중에는 우리 신앙인이 취해야 할 하느님과의 영적 생활과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나 우리가 무관심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 그리고 교회와 사회에서 맡은 바 역할에 관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영적 관계, 이웃에 대한 관심, 사회적 역할과 책임 등 이 세 가지는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일상생활에서 실현해야 할 과제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별개의 것이지만 서로 연결되어서 상호 작용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과 지혜와 능력을 주고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윤택하게 만드는 근원적 요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기 기도와 사랑과 봉사라는 온전한 잣대를 가지고 올해의 신앙생활을 결산한다면 그 득실을 파악할 수 있고 오는 새해를 다시 계획하고 운영하는데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3.

 지난 한 해는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가 극심한 변화와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혁명의 시기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정권교체라든지 세계경제가 몰락의 위기에 빠지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삶이 무엇으로 지탱되었는지 스스로 검토해야 될 것입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자기만 살려고 발버둥치는 아비규환의 세태 속에서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을 지니고 살았는지 자성해 보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여러분들의 결산은 무엇입니까?
 지난 17일 인터넷 신문에서 본 감동적인 이야기 한 토막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이 조간에도 실렸다고 합니다. 조 바나비 씨 가족이 한국 어린이를 입양한 하나의 사건이 실려 있었습니다. 바나비 씨는 한국인 2세인 부인 크리스틴 안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미국 롱비치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국 여아를 입양하기로 하고 지난 4월에 18개월 된 엘리자베스를 데려왔는데 1주일 후 여아가 청각장애인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입양기관이 이 사실을 속인 것입니다. 이 부부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함께 고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얼마 동안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어느 날 “입양한 아이는 내가 낳은 아이와 같으니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자 남편도 동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딸 엘리자베스의 청각장애를 해결하기 위해 인공와우수술에 19만 5천 불, 언어 프로세서를 위해 1만 5천 불을 투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각장애를 돕기 위해서는 부모 중의 한 사람이 항상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의논 끝에 부인이 세계적 컨설팅 회사의 간부로 전망이 밝으므로 계속 직장에 남기로 하고 미국 내 8개 공장을 책임을 진 부사장인 남편이 회사를 사직하고 딸아이를 돌보기로 하였습니다. 그의 사직 이유는 매우 감동적입니다. ‘19년 전 내가 이 회사에 입사할 때는 풋내기 기술자였다. 지금은 풋내기 아빠이다. 회사에서는 잘 듣는 아빠가 아니었으나 청각장애인 딸 덕분에 듣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바나비 씨 내외는 경제공황이 닥쳐오는 위기촉발의 시점에서 하나의 보잘것없는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들의 직업, 명예, 재물, 시간 전체를 투입하는 인생의 올인을 일삼은 것입니다. 저는 그들이 크리스천인지 아닌지 묻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우리가 추구하는 하느님과 동행하는 신앙의 원리와 우리가 실현하려는 사랑과 봉사를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들이 금년을 기점으로 이미 인생의 절정에 도달하였고 그들에게 영원한 승리의 월계관이 주어졌다고 믿습니다.
    
4.

 시인 임인진 씨가 겨울호 “성서와 문화”에서 자작시 “연어”를 소개하면서 그것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태백의 연봉마다 오색으로 물들었던 단풍이 질 무렵 남대천 개천가에 무서리가 내릴 때 이유를 알 수 없는 꼴찌로 돌아오는 연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연어는 남대천 아래 붓둑 밑에서 몇 번이고 뛰어오르려다가 끝내 지쳐서 자갈이 깔린 물가로 밀려나 배를 깔고 드러눕습니다. 치어 때 남대천을 떠나 성어가 된 이 연어는 누구를 만나리라는 기약도 없이 머나먼 북태평양, 오호트크 바다, 베링해협을 거쳐 캄차가반도 서쪽 해안까지 수천만 리 바다길을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것입니다. 시인은 만삭이 된 연어가 이제 고향에 돌아와 알을 낳아놓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고 떠나는 것을 생각할 때 그 삶이 너무나 아름다워 큰 감동을 느낀다면서 하느님의 생명으로 만들어진 우리도 삶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 것인지 깊은 성찰을 해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인은 연어의 일생에 관해 말하면서 우리 인간의 말로에 대한 암시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젊었거나 늙었거나 간에 내년을 기약할 수 없고 미래의 보장이 없는 유한한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해의 결산을 내년으로 미루는 기업가가 없는 것처럼 우리도 결산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해의 개인적, 사회적 삶 속에서 신앙생활을 얼마나 성실하고 창조적으로 했고 어느 정도 성숙의 차원에 도달했는지 살펴보고 설혹 내년이 없다 하더라도 금년 한 해 동안 신명을 다해 이룩한 것으로 만족하고 삶을 마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은 올 한 해의 완성인 동시에 인생 전체의 완성도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인생은 끝머리에 가서야 정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가운데서도 이렇게 최고봉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삶의 수수께끼이고 불가사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완성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공짜 만나가 아니라 갈등과 고난과 희생이란 십자가와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올 한 해의 신앙생활을 결산하면서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으면 좋겠고 그렇지 못하다면 내년에는 더욱 분발하여 신앙의 절정에 이르는 축복된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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