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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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8/ 빌립보서 1:15-21

신반포교회 이계준 목사

 

1.

 소설가 이지민 씨의 단편 중에 “대천사”라는 글이 있습니다. 미미라는 여성이 일곱 번 성형 수술하여 완벽한 미인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수술하기 전에도 예뻤으나 평범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쌍꺼풀에서 시작하여 팔뚝, 다리, 턱, 코, 입술 등을 수술하면서 아름다워지기 위해 뼈를 깎는 아픔을 견딥니다. 그녀는 수술을 위해 퇴직금도 날리고 아버지에게 신세도 지며 성형외과 의사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옛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미미가 변하는 것을 보면서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예뻐지다가 나중에 무엇이 되겠는지 걱정하지만 그녀는 앞으로의 문제는 접어두고 육신이 살아있을 때까지 반짝이는 존재가 되려고 합니다. 또한 그녀는 육체의 고통을 겪는 동안 몸 뿐만 아니라 영혼도 무엇인가에 의해 단련되었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나의 모습처럼 나의 내면도 순수하고 아름다워지지 않았을까 그런 기대를 품어봅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여성 뿐만 아니라 현대인 모두가 자기가 바라고 되고 싶은 새로운 자기 자신을 위해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자기의 본래 모습을 포기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사람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본래 자기 모습이 있는데 그것을 버리고 일종의 가면을 쓴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자기의 겉모습이 변하면 자기의 인격도 변한다고 착각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오늘 현대인들이 삶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 묻고 그것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 맡겨버리거나 변질된 자기 모습을 본래의 것으로 여기는 비이성적이고 무책임한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이렇듯 개인의 자기 정체성의 문제가 사회 전면에 그대로 드러나는 현상이 근자에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작년에 인기 가수 나훈아 씨의 육체에 관한 괴설이 세간의 관심이 되었을 때 그가 한바탕 돌출극을 벌인 사건이 있었고 탤런트 최진실 씨의 자살로 인해 비애를 느끼고 동반 자살자들이 생겼는가 하면 비전문가인 미네르바 작자의 말에 대중은 물론이고 학자와 정부까지 중심을 잃고 좌우로 흔들리는 현상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당분간은 피겨스케이팅 세계 1위 한 김연아 증후군이 지배할 것입니다.
    한 심리학자는 이런 사회적 현상에 대해 “자기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어떤 결정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떠도는 이야기는 많은데 정작 자기 이야기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삶의 과정을 통해 의미와 목적을 채워줄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없으니까 부지불식간에 내가 당신이 되고 당신이 내가 되는 혼선이 일어나고 나란 존재가 증발해버리는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연세대학 황상민 교수는 지난 주 일간지 ‘오피니언’란에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란 제하의 글에서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다른 시각에서  진단하고 있습니다. 황 교수의 분석을 요약하면 대개 이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경제위기의 불안, 국회의 난장판, 용산 참사의 충격, 군포 연쇄살인자 등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국 우리가 즐겨보는 TV 드라마의 화면이 현실로 바뀐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방영되었거나 방영 중에 있는 인기 드라마 가운데 ‘너는 내 운명’, ‘에덴의 동쪽’, ‘아내의 유혹’ 등은 지금 대한민국 국민의 대중 심리를 알리는 보고서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드라마들은 “출생의 비밀, 복수, 불륜, 음모와 배신, 신분 상승에 관한 욕망으로 가득 찬, 욕하면서도 본다는 소위 막장 드라마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막장 드라마가 때로는 현실로 드러나서 우리를 놀라게 하고 비통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속출한다고 합니다. 생존권이니 법질서니 떠들지만 극단적인 투쟁과 권력의 남용이 대결하고 서로 다른 욕망들이 갈등하면서 삶의 불안, 사회의 불신, 세상에 대한 공포를 조성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병리적 현상이 왜 나타나는 것입니까? 황 교수의 결론은 먹고 살기 힘들거나 경제가 어려워서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또 이 나라에서 내가 자랑스러워 할 것이 무엇인지 점점 알 수 없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황 교수의 말도 결국 현대인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에 대해 알지 못하는 정체성 상실에 직면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우리가 이렇게 개인적으로 또한 집단적으로 정체성 상실에 빠진 근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학문의 여러 분야에서 연구보고서가 많이 나왔고 각양각색의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저는 그 근본원인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그것은 우리 교육철학의 빈곤에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 가정에서나 공교육에서 인성을 계발하고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8.15해방 전후의 교육을 돌아볼 때 이조시대의 과거급제를 위한 교육의 영향으로 출세지상주의와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물질지상주의가 지배해 왔고 지금도 현재진행입니다. 그러므로 성장하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출세와 물질을 위해서 전력투구하도록 자극은 하였으나 ‘나는 누구이고 나는 왜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에 관한 인간교육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은 독자적인 생각과 판단, 자율적인 행동과 책임이 결핍되기 때문에 자연히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타인의 삶을 모방하거나 또는 자기 자신을 남에게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던 간에 중심만 잡혀 있다면 풍문에 귀를 기울이거나 무조건 남의 의견에 동조하거나 또는 증권가의 낭설, 인터넷의 괴문, 매스컴의 오보 등에 놀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체적인 사람은 ‘백로처럼 까마귀 싸우는 곳에 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에 설 수 있다면 세상이 온갖 위기로 열 번 뒤집힌다고 할지라도  나는 항상 나대로 자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오늘의 본문들은 인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일러주는 말씀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요한복음 1:4-8은 세례자 요한이 유대광야에 처음 나타나서 회개를 선포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면서’ 다음과 같이 자기의 정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나보다 능력 있는 분이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 자신이 유대인들이 학수고대하고 있는 대망의 구세주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가 오시는 길을 닦는 인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요한은 하느님 나라 사업에 있어서 주역이 아니라 조역이라는 것으로 자기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신약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예수는 요한의 제자이었거나 그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요한은 예수의 스승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위치를 예수 아래로 격하시킨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례자 요한은 그의 인격과 역할이 부정되거나 무시당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았고 자기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1:15-21의 말씀도 사도 바울의 자기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빌립보 교우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가운데 어떤 사람은 순수한 동기에서 복음을 전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경쟁심리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바울을 해치려고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므로 자기는 기뻐한다고 하면서 관용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자기의 간절한 소망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의 정체성을 지탱해 주던 세상의 지식, 바리새인의 지위, 로마의 시민권 등 높은 사회적 신분을 모두 포기하고 스스로  이름 없는 소위 자칭 사도로 격하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만을 위해 생사를 결단한다는 것에 삶의 중심을 둠으로써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의 삶과 말에서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이란 무엇인지 그 모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신분을 스스로 격하시키면서도 흔들리거나 자기 상실과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한층 더 확신을 가지고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는 사도들이 된 것입니다. 실로 놀라운 자기 정체성의 재발견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5.

 기독교를 포함해서 모든 고등종교들은 그 의식과 교리는 달라도 결국 인간의 정체성 곧 진정한 자기 발견을 지향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의 생로병사나 온갖 위기와 역경에 허둥대지 않고 삶의 중심을 굳게 붙잡으면서 사람답게 한 평생 살아가는 길을 찾도록 인도하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도적 종교가 발전하면서 인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역할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종교의식이나 교리에 매달리고 강요함으로써 종교의 본질은 땅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국의 스님 아잔 브라흐마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스님이 언젠가 불자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도와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스님에게 말하기를 자기가 500바트(1바트가 우리 돈 30원)로 선물을 사드리고 싶은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는 것입니다. 스님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 다음 날 알려주기로 하고 돌아가서 필요한 물건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태국의 스님들은 실상 극빈 상태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으므로 목록은 500바트를 뛰어넘어 5000바트로도 모자랄 정도로 확대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된 스님은 그 목록을 당장 찢어버리고 그 다음 날 불자를 만나 그 돈으로 절을 짓거나 선한 일에 쓰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스님은 물건을 받는 것보다 그 전날까지 지녔던 삶의 만족감을 회복하는 것이 더 필요하였다고 합니다. ‘돈도 없고, 어떤 것을 구할 수단도 없었을 때, 그때가 자기의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는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권면을 남겼습니다. “원하는 것에는 끝이 없다. 설령 1억 바트나 이억 달러를 가졌다 해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원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는 끝이 있다. 그것은 당신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이다. 그때만이 당신은 완벽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순수한 자기만족 곧 자기 정체성이란 소유하는 것 보다 소유에서 자유할 때 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체성이란 무엇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님과 우리의 차이가 있다면 그는 속세를 떠난 사람이고 우리는 날마다 세속 속에서 부딪치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님은 모든 것을 떠나서 자기 혼자 정신적 충만함에서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오히려 소유를 가지되 그것도 충만해야 우리 자신은 물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스님처럼 절대청빈이나 절대 무소유가 불가능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상대적인 의미에서나마 지금의 나 곧 결핍된 자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만족할 수 있어야 정체성에 근접할 수 있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세속 사회에서 살아가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아니겠느냐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자기 터전을 확고히 함으로써 세속의 풍문이나 유혹의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평온하면서도 보람찬 삶을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 특히 우리가 직접 몸담고 있는 이 사회는 우리의 참 모습을 찾기에는 가치기준이 너무나 혼란스럽고 지향하는 목적이 너무나 공허한 광야와 같은 삭막한 지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광야를 홀로 걸어가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야 하고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자기 자신과 끝없이 외로운 씨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끈질긴 씨름 끝에 ‘너는 이스라엘이다’는 이름을 얻은 것과 같이 ‘나는 나다’는 확신을 얻는 놀라운 은총의 순간이 부지불식간에 다가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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