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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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조선일보 2004. 2. 14.) 어느 일간지에 실린 칼럼 가운데 한국사회병리연구소장이란 분이 쓴 “‘네 가지 맛‘ 잃은 한국인들”이란 제목의 글이 있었는데 간단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최근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 10명 중에 8명이 삶의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그 중의 상당수가 종교를 찾거나 알코올에 의존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임상을 해 보면 주부들의 우울증이 계속 증가하고 있고 이들은 입맛, 잠맛, 성맛, 살맛 등 네 가지를 잃었다고 호소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만은 부부싸움과 이혼으로 연결되고 심리적 갈등은 여러 가지 노이로제 증상을 일으키는 동시에 이것이 밖으로 터져 나오면 사회범죄로 연결된다고 합니다.
이 글 쓴 이는 한국인의 노이로제와 범죄현상의 원인을 3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1960년 대 이후 산업화 과정을 통해 잘 살게 되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물질 중독증에 걸렸다고 합니다. 둘째는 1980년 대 이후 민주화 투쟁으로 민주화는 어느 정도 이루었으나 모든 권위를 제거한 다음 자기의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는 소홀히 하였고 제몫을 찾으려는 노사갈등, 지역갈등 및 세대갈등이 이러났으며 산업화를 이룩한 세력과 대기업이 무너지면서 경제침체, 청년실업, 시민 층의 고통 등으로 집단적 우울증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남 갈등이 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즉 북한 김정일의 일인 독재정치를 외면한 채 무조건 ‘민족공조’니 ‘외세배격‘이니 외쳐대면서 이 나라의 정통성과 자긍심을 무너뜨리므로 ’집단자학증‘과 ’희망 상실증’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글 쓴 이는 오늘 우리 사회의 심각한 정신병리현상을 해결하는 길을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노무현 정부가 국민이 바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모두가 단합할 수 있는 화합과 통합의 청치를 펴는 것이고 둘째는 국민 각자의 성숙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남을 비난하는 것 대신에 책임의식을 지니고 성급한 행동 보다는 인내심을 가지며 눈앞에 이익 보다는 민족에 대한 사명감이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이거 큰 일 이구나 그리고 결국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만정 나도 이 물질중독증, 우울증, ‘집단자학증’과 ‘희망 상실증’에 빠졌겠구나 하는 충격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충격을 받은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할 일은 그의 책임에 맡 낄 수밖에 없으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우리가 이 사회적 병리현상을 예방하는 것이고 만일 그것에 감염되었다면 하루 속히 빠져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보다 건강하고 인간으로, 보다 성실한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가 익히 아는 야곱의 아들 요셉의 삶과 사람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요셉은 야곱의 아들로써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두 아들 가운데 첫째입니다. 그는 자기 부모의 편애와 함께 물질적으로 풍부한 생활을 하는 부자 집 아들이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큰 아버지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산 다음 자기를 위협하는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수십 년간 노동하면서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부모의 편애와 그가 꾼 꿈이 형제들의 원한을 사게 되어 애급 상인에게 노예로 팔리게 됩니다. 그는 보디발이라는 바로왕의 경호대장 집에서 종이 되었습니다. 부자 집의 귀한 아들이 졸지에 종으로 변한 것입니다. 나이 어린 요셉은 말할 수 없는 충격과 고독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와 함께 계심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 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종의 일을 불철주야로 성실하게 감당하였습니다. 그는 비록 종의 신세가 되어 다른 집의 일을 돌보지만 자기의 일처럼 꾀부리거나 속이지 아니하고 정직하게 일하였습니다. 주인은 요셉의 하는 일을 보면서 하느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것과 하느님은 요셉이 하는 일과 또한 자기 집의 모든 일을 잘되게 축복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보디발은 자기의 먹거리를 빼고는 모든 재산을 요셉에게 맡기고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셉이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호강스럽게 살다가 불행하게도 종의 신세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물질의 욕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도 인간인데 왜 물질에 대한 탐욕이 없겠습니까? 이것은 그가 훌륭한 부모를 통하여 물려받은 가치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의 사람은 물질보다는 신앙이 우선이고 일에 있어서 꾀부리기보다는 성실하고 타인의 재물과 나의 것을 분간할 줄 아는 분별력이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모든 재물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고 인간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니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라는 정신적 풍요를 누렸을지도 모릅니다. 여하간 요셉의 생활환경과 사회신분은 크게 달라졌지만 그의 가치관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1960년대 이후 산업화과정을 겪으면서 다행히도 보리고개도 넘기게 되고 GNP 1만 불에 도달하면서 풍요를 구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회와 기업의 지도자들 그리고 노동자들의 말할 수 없는 노력과 희생의 대가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풍조를 보면 아무런 창의성이나 노력도 없이 누구나 꼭 같이 잘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절대평등주의나 사회주의적 가치관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사는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돈이 있어야 하고 노력하지 않고도 잘 살 수만 있으면 무슨 짓이던 해도 된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습니다.
최근에 일어나는 사건 중에 은행원이나 증권회사 직원들이 고객이 맡긴 돈을 갖고 달아나는 사건이 자주 있습니다. 고객들이 그들을 믿고 맡긴 것을 갖고 도주한다는 것은 남의 것을 훔친다는 도둑질인 동시에 믿고 맡긴 것에 대한 배신행위인 것입니다. 돈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성실하지 못하고 물질 중독에 빠지는 것은 가치관의 전도와 자기 인간성의 파괴인 동시에 하느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소명의식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실상 우리도 요셉과 같이 주인의 일을 하고 그의 재산을 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하고 그가 우리에게 맡긴 재산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일이 어떤 것이던지 간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관리하는 재산이 얼마든지 간에 신용 있게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기관이나 기업의 고용인이기 전에 하느님의 부름 받은 종이라는 사명의식을 철저하게 지녀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물질 중독증에서 해방되고 더 큰 일이 맡겨질 것입니다.
세계적인 곤충연구가 앙리 파브르가 중학교 교사로 있을 때 그의 논문을 읽고 높이 평가한 교육부 장관이 연구실에 찾아와서 악수를 청하였습니다. 파브르는 자기 손이 더럽다고 사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교육부 장관은 실험비를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파브르는 더러운 손을 잡아준 것으로 충분하다면서 거절하였습니다. 감동한 장관은 그의 손을 번쩍 들어올리면서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이 손을 보십시오. 이 일하는 손이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아름다운 손입니다.” 파브르는 칭찬이나 돈에 관계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만 충실한 요셉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로 요셉은 성실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건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얼굴이 미남이고 용모가 빼어나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여인이 요셉을 유혹할 때 그는 말하기를 주인이 자기에게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기의 손 안에 있지만 마님만은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으니 자기는 나쁜 일을 할 수 없고 또한 이것은 하느님을 거역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그녀의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자기를 피하는 요셉의 옷자락을 칼로 베어가지고 남편에게 보이면서 요셉이 자기를 유혹하려고 했다고 모함하였습니다. 아내의 말을 들은 보디발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요셉을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항의하지도 아니하고 감옥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의 단정한 감옥생활은 간수장의 신용을 얻게 되었고 요셉이 모든 죄수들과 모든 일들을 처리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 습니다. 간방의 반장으로 출세한 셈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요셉이 얼마나 성숙한 인격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여인에게 유혹을 당할 때 양심을 지켰고 이것 때문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도 태연하게 묵묵히 지내는 모습 그리고 종의 신분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다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옥 같은 속에서도 자기의 삶에 충실하고 책임자에게 인정받는 차원까지 올라간 모습을 상상할 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인기절정에 있는 영화 “실미도”에는 살인적인 훈련을 받고 있는 두 병사가 육적인 욕망을 이기지 못해 탈영해서 어느 창녀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들이 탈영한 사실이 발각되고 수비병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한 병사는 자살하고 또 한 병사는 공개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는 이성이나 양심으로 극복할 수 없는 탐욕이 항상 불타고 있고 그것이 밖으로 분출될 때 불행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며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는다“는 바울의 명언과 같이 인간은 자기에게 허락된 절제된 욕망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때로는 넘지 말아야 할 선 까지 넘으면서 자기의 탐욕을 채우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양심을 지킨 결과 감옥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양심을 범하고 큰 죄를 짓고 감옥살이하는 지도층에 속한 사람들이 모법수로 자기 형기를 다 마치고 출옥했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무거운 형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감형되고 병보석이나 대통령 특사로 모두 출감하였습니다. 그 대신 잡범들은 주어진 형량을 대부분 마쳐야 출옥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도덕적 무질서와 허무주의 속에서는 모두가 집단적 우울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 우리 신앙인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양심의 소리를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하느님이 저 밖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산 증거입니다. 존 웨슬리는 양심은 우리에게 선과 악을 알려주는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양심을 지키려고 할 때 때로는 마음이 괴롭고 손해가 뒤따라오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과 죽음이 엄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양심을 지킨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고 그의 거룩하신 뜻을 이 땅에 증거하고 확장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부활해야 이 나라에서 기독교인의 존재의미와 교회의 장래가 있음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십 명의 제자를 둔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어떤 제자만 편애한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참 새 한 마리씩을 주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가서 죽인 다음 먼저 가져오는 사람에게 자기의 모든 지식을 주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나가서 참 새를 죽여가지고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유독 편애 받는다는 제자만이 산 참 새를 그대로 가지로 돌아왔습니다. 이유인 즉 아무도 없는 숲 속에 들어가서 참 새를 죽이려고 하니까 자기 양심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새를 죽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이에프스키는 말하기를 “영혼 속에서 외치며 끊임없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죽도록 가슴을 괴롭히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양심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우리의 가슴을 괴롭히는 양심의 소리를 항상 들으면서 그대로 살고 실천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것은 양심이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음성대로 산다면 우리가 있는 곳이 궁궐이던지 아니면 감옥이던지 관계없이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 속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요셉은 실로 용서와 화해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바로의 꿈을 해몽하여 총리대신이 된 다음 기근이 들었을 때 형들이 애급으로 곡식을 사려고 왔습니다. 형들이야 요셉을 알아볼 수 없지만 요셉은 그 형들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요셉의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아마도 분노와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고난의 단련을 통하여 쌓아올린 인내와 용서의 미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형들에게 이런 저런 모양으로 고통을 주기도 하였으나 마지막에는 자기의 정체를 밝히고 형들 앞에서 목 놓아 울었습니다. 창세기 45:1f에 보면 요셉은 자기가 에집트에 오게 된 것이 형들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기근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를 먼저 이 곳에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의 통찰력입니까! 요셉은 자기가 하느님의 구원의 도구라는 사명의식을 분명히 갖고 있었기 때문에 형들에 대한 인간적인 증오나 원한을 넘어서서 형제간에 하나 되고 화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시고 그 뜻대로 사는 사람은 인간의 갈등과 분열의 벽을 뛰어 넘는 신앙의 용기와 비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질적인 병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편 가르는 것입니다. 네 편과 내 편, 네 지방과 내 지방, 네 학교와 내 학교, 네 코드와 내 코드 등 서로 편을 가르는데 천재적 소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편 끼리는 살이라도 뜯어 먹이고 부정부패를 자행하면서 함께 살아갑니다. 이와 반면에 상대방에게는 갈등과 음모와 모함으로 일관합니다. 우리는 자기편이 아니면 아무리 옳은 말을 하고 바로 살아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 속한 사람이면 아무리 잘못이 크고 질이 나빠도 이해하고 용납합니다. 그러면서도 동포니, 민족이니, 통일이니 하면서 날마다 거짓을 밥 먹 듯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중성과 위선이 결국은 삶의 허무와 절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호남과 영남이 갈라지고 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이 분당되고 국회에서 이락파병이나 FTA협정 문제 해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국민들의 일반적인 생리라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서로 이해와 의견이 다르면 만나서 토론하고 조정하고 공통분모를 찾아 협력하므로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이룩합니다. 즉 그 사회에는 정, 반, 합이란 변증법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다른 생각과 의견을 이해하지도 타협되지도 않고 무한한 갈등과 분열과 파괴만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음양이 있다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무엇이 창조될 것인데 영원한 대립과 분리만 있으므로 거기에는 다만 멸망의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나라의 국민으로,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해야 할 과제와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분열주의적 고질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잘못된 의식을 고치려는 인격적 결단과 실천이 우선 있어야 하겠고 우리 가정과 사회에 있는 온 갓 분열을 화해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중심의 좁은 시야를 버리고 요셉처럼 하느님의 넓은 구원의 시야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네 편, 내 편 가르는 편협하고 옹졸한 마음을 버리고 우리의 삶은 하느님이 우리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만나고 화해하고 창조하는 구원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있다는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위기 중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물질적 탐욕과 양심의 부재 그리고 분열주의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신앙 안에서 성실과 양심과 화해의 역할을 회복하므로 이 사회의 온 갓 병리적 현상을 제거하고 하느님 나라 건설에 이바지하는 요셉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요셉이란 사람 2004. 2. 15.
창세기 39:1-10; 45:1-7
이계준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