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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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은 사순절 둘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성금요일 40일 전에 시작됩니다. 이 기간에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삶의 현장에서 그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2000년 전에 골고다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준다는 사실을 이 사순절 기간에 깊이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고난 곧 십자가 사건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라는 종교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는 것을 반대하는 자가 그의 측근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대통령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그의 측근 인사들이 온갖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대통령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것과 같이 예수의 제자, 그것도 수제자인 베드로가 예수께서 고난당하시고 하느님의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룩하시려는 것을 반대함으로써 그 뜻을 이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제자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서부터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었을 때 혹은 세례 요한이라고도 하고 혹은 엘리야나 예레미야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마태 16:16)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 감격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놀라운 말씀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태 16:17-18)
이렇게 위대한 신앙고백의 주인공이 되고 주님에게서 놀라운 칭찬을 들은 베드로가 그 다음 순간에 크나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당하시고 죽었다가 부활하게 되리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님을 붙들고 말하기를 “주님, 안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됩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를 칭찬하셨던 주님은 그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고 책망하셨습니다.
엿새 뒤에 이것과는 정반대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는데 갑자기 그의 모습이 변하였습니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을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는 말하기를 여기가 좋으니 초막 셋을 짓고 거기에 한 분씩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에 대해 반응하시지 않았습니다. 위의 두 사건에서 베드로가 취한 태도에 대하여 질문을 던져 봅니다. 그는 왜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당하시는 것을 반대했을까요? 그는 왜 신비롭고 환상적인 산 위에서 주님과 선지자들을 모시고 살겠다고 기발한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변화산의 환상적인 모습에 대한 베드로의 색다른 태도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베드로가 주님의 고난을 원치 않았던 것은 성서학자들의 말처럼 그가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열심당원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정치적 메시아 역할을 통하여 민족해방을 기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베드로의 인간성이 열정적이고 단순하여 선생님에 대한 순간적이 연민이 작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말씀처럼 모두 사람의 생각에 불과한 것이지 하느님의 생각이나 계획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산 위에서 변모하신 사건도 이와 정반대의 상황임에는 틀림없으나 결과적으로는 같다고 하겠습니다. 어린 아이가 처음으로 디즈니랜드나 레고랜드를 본 것처럼 너무나도 환상적인 장면에 넋을 잃은 베드로는 거기서 스승들을 모시고 영원히 살려는 충동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 순수한 심정을 그 누구도 나무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도 이번에는 베드로를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내심으로는 어리석은 제자의 애정 어린 말을 들으시고 기뻐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셔야 했고 거기서 기다리는 고난의 길을 걸어 가셔가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생각과 말은 모두 수포로 돌라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주님에 대한 연민과 환상적인 발상을 예수께서 용납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사건 때 말씀하신 것에 그 이유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해서 좋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무엇이고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것을 쉽고 단순하게 알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른의 생각과 아이의 생각, 부모의 생각과 자녀의 생각을 비교하면 속히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어른이 아이보다 못하고 부모가 자식보다 못한 비정상적인 현상도 나타나긴 하지만 그래도 어른이 아이 생각하고 부모가 자식 생각하는 것이 그 반대보다는 월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장한 어른이란 미숙한 아이들을 염려하고 돕고 배려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기의 생활과 생명까지 희생하면서 자녀를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 부모의 자식사랑이야 지나쳐서 문제이지 세계에서 최고라고 해서 과언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은 자기의 거룩한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버리고 탈선했을 때 자기희생 곧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철없는 인간을 다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비록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심지어는 억울하기까지 할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고 실천하는 죄로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생각한 것은 하느님의 생각처럼 희생적 사랑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극히 자기중심적이고 고작해서 민족주의적인 발상에 불과했습니다. 자기가 존경하는 선생님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희생되지 말아야 하고 혹시 다행한 경우에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주도할 지도자이기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베드로의 생각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 할 수 있는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통해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2. 우리는 베드로의 생각과 행동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며 수제자의 역할을 하였지만 주님이 세상에 오신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과 같이 우리가 제도적 교회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배우고 주님의 진리를 따라 세상을 살아간다고 해도 그의 말씀과 삶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몸소 행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진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는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 말씀을 듣고 해석하려는 데서 일어나는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리 생각을 주님께 강요하고 멋대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과 뜻을 바로 깨닫고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추진하시고, 이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때 제자가 된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죽음을 방해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고의적이던 아니던 간에 ‘십자가 없는 예수’를 만드는 다른 종류의 가롯 유다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도 십자가의 고난을 멀리하겠다는 무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 십자가 없는 교인 그리고 십자가 없는 기독교가 있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맛 잃은 소금처럼 아무 쓸데가 없어 길가에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한국의 교회이고 우리 자신이 아닐까 하는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산 위에서 일어난 황홀경의 이야기도 ‘십자가 없는 예수’와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비로운 광경이 전개되고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 등 위대한 인물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분위기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지 않는 제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신비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거기서 지내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산 아래에서 벌어지는 고통과 싸움과 죽음 속에서 방황하는 생명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산 위에서 팔자 좋게 휴양을 취하실 귀하신 몸이 아니라 고난이 가득 찬 세상으로 내려가서 고난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민초들과 함께 있어야 할 천하신 분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관광여행을 위해 오셨다면 헤롯의 궁전에서 황태자의 모습으로 탄생하실 것이지 목수의 아들로 시골 여관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실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 한국기독교인들은 유독이 베드로처럼 신비하고 황홀한 장면과 체험을 좋아합니다. 그런 경험이 없으면 신앙인으로 간주하지도 않는 교회도 허다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보았다는 사람, 불세례를 받았다는 사람,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 온 갓 은사를 받고 불치의 병을 고치고 또한 고침을 받았다는 사람 등 신비로운 체험을 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또 어떤 교회는 그것이 예배당인지 극장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건축물과 실내장식이 화려하고 현란한 영상매체와 하늘의 음성같이 울리는 음향기기를 설치하였습니다. 옛날 베드로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 속에서 신비스런 체험을 즐겼는데 현대인은 자기가 만든 기술문명으로 신비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에는 본래 인간의 지각과 경험을 초월하는 신비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체험을 바라고 또한 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버러진 환상적인 장면은 잠시 후에 사라지고 예수께서는 제자를 다리시고 일상적인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종교적 환상과 체험은 세상의 삶 속에서 말과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화에서 보는 갈보리 산 위에 서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에 불과하고 진짜 십자가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되는 사랑의 행동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종교인 기독교는 처음부터 산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땅 속의 카타쿰과 세상의 고난 속에서 존속되고 확장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처럼 산 위에서 본 신비경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3. 1000만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실미도”에 이어 “태국기 휘날리며”가 격찬리에 상영 중입니다. 6.25동란을 중심으로 만든 이 영화를 보고 보수적인 사람은 북한 찬양과 사회주의 이념의 산물이라고 하고 진보적인 사람은 잔인성에 있어서는 남북한이 따로 없고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념의 벽을 넘어서 인민군으로 투쟁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할 것입니다. 사람은 결국 자기의 이념과 가치관에 따라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영화의 주제가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 문화의 특징인 가족관계를 통해 휴매니즘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그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않으면 많은 오해와 곡해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 속에 깊이 숨어 있는 진리를 바로 이해하고 진리대로 사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나 연극, 기타 예술 작품을 수 없이 보고 감상한다고 할지라고 제대로 보고 들을 줄 아는 이목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나 가치가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성경을 수백 번 읽고 암송하고 교회를 수십 년 다닌다고 할지라도 과연 성경말씀의 핵심이 무엇인지,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하려고 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지식과 실천의 높은 차원에 올라가지 못하면 개인적으로는 베드로처럼 주님의 뜻을 모르는 사이비 제자가 될 수밖에 없고 사회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과 행동으로 전파할 줄 모르는 종교적 장애인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경험이 많은 농부가 하느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하느님에게 말하기를 하느님은 농부가 아니니까 농부들의 사정에 대해 잘 모르시기 때문에 한 가지 청을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이 농주에게 그게 뭣이냐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자기에게 1년이란 시간과 원하는 것을 모두 주신다면 가난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허락을 받은 농부는 농사짓기 가장 좋은 환경을 원했습니다. 이제 그는 비바람도, 태풍도, 천둥도 없고 화창하기만 한 날씨 속에서 농부는 즐거운 한 해를 보냈습니다. 드디어 가을이 되어 곡식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알맹이는 하나도 없고 모두 껍데기 뿐 이었습니다. 놀란 농부는 하느님에게 다시 가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하느님이 대답하시기를 “그것은 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갈등과 혼란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해되고 좋지 않은 것은 모두 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껍데기만 있고 알맹이가 없는 것이다. 비바람과 천등이 섞인 약간의 고난과 약간의 시련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껍데기 속의 영혼들이 더 단단히 영글지 않겠나!”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농부는 베드로나 우리의 생리와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인생은 고해이고 산다는 것은 곧 고난 속을 헤엄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힘들고 아플지라도 온 힘을 다 해서 헤쳐 나갈 때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따른다는 것은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인격적 결단이고 그것은 또한 우리가 자발적으로 이웃과 세상을 위해 져야하는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삶이란 십자가의 길인 동시에 십자가 없는 삶은 진실하고 성숙한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고난을 지나 영원한 축복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우리가 져야하는 십자가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보이는 앞면에는 가난, 핍박, 차별이란 십자가가 있고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욕망, 교만, 위선이라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면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난 것입니다. 그러나 앞면보다는 오히려 뒷면의 십자가가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가져옵니다. 밖에서 오는 십자가는 비교적 이기기 쉽지만 안에 있는 십자가는 암의 균과 같아서 어떤 영웅호걸이나 심지어 성자도 이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밖의 십자가를 극복하여 세속적으로 행복하기 바라지만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 속에 있는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이길 때 밖에서 오는 고난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사순절에 주님을 “십자가 없는 예수”로 만드는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예수”가 하느님의 일임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의 고난의 길을 따라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감으로써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도록 묵상하고 힘써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없는 예수 2004. 3. 7.
마태 16:21-23, 누가 9:2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