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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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성금요일 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그 날 낮도 오후 3시 이후에는 칠흑같이 어두운 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태양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갈보리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죽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의 밝은 낯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빛을 거두니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이 어둠 속에는 인간의 생명의 양식인 사랑과 진리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인간에게 해독이 되는 증오와 폭력과 죽음만이 가득 찼습니다. 이 밤은 너무나 어두워서 어떤 희망의 빛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침묵만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밤은 좌절과 불안과 공포만이 가득 찬 절망과 죽음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밤이 인간역사의 종말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흘러온 낡은 역사의 밤은 지나가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기 바로 전 순간이었기 때문에 어두움이 더욱 짙었는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하던 인간의 욕망과 갈등, 무관심과 폭력의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사랑과 정의, 자유와 평화가 지배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골고다 언덕에서 로마의 권력 앞에서 무력하게 죽어간 가련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죄악을 자기 한 몸에 안고 죽음으로써 그 죄악을 멸절시킨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십자가 죽음이 불러온 캄캄한 밤은 절망의 연속이 아니라 그 속에 새벽을 품고 있는 생명의 모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2. 우리는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생명과 진리를 전해 줄 새 빛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자기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드실 때 하신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롯 유다가 사탄에게 유인되어 밖으로 나간 다음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새 계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는 새 계명의 내용은 “서로 사항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왜 새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구약성서에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고 예수께서도 그 계명을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여기서 새 계명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을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 속에 가장 귀한 진리가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 같이 무조건적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은 조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귀족의 자손이고 지식인이고 사회적 명성이 높다는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갈릴리의 어부로써 가난하고 무식하고 천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무조건 사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들에 대한 사랑은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비천한 그들을 제자들로 삼우시고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라칠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 건설의 동역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노예와 같이 천한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자격을 갖게 하였고 그들과 동거 동락하면서 사람되는 길을 보여주었으며 열정을 다 바쳐서 그들을 친 형제자매 이상으로 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하느님의 역사를 증거하셨고 제자들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이 구원의 역사를 계승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고 하실 때 이 사랑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 형제자매를 위해서, 아니 하느님의 인류구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십자기에 죽는데 까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역사적 교회는 이 새 계명을 생명으로 삼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믿어왔습니다.

3. 첫 성금요일이 지난지도 벌써 2천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그 때의 어두움이 계속되고 있고 아마도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오늘의 놀라운 기술문명을 창조하고 살아가는 우리 문화인들이 인간으로써 마땅히 지니고 살아가야 할 진리를 모두 십자가에 처형한 것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생활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하는 온 갓 기술을 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삶을 사랑스럽고 평화롭게 하는 진리를 잃어 벌인지 오래 되었습니다.
오늘의 이라크 사태를 보십시오. 세계의 초강대국인 미국은 독재와 대량살상부기를 근절시켜서 세계평화를 이룬다는 명목 하에 이라크전쟁을 시작하였고 짧은 시간 내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라 전쟁을 위한 구실에 불과하였고 오히려 초현대식 무기로 무고한 생명을 수도 없이 희생시키고 인류의 문화재를 파괴하면서 전쟁의 숨은 동기인 유전을 장악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듯 보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기독교 국가가, 그리고 감리교인인 대통령이 저지른 최대의 죄악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은 승리로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점점 다시 불이 붙고 새로운 전쟁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미국은 앞으로 과거 월남전에서와 같이 쓴 잔을 마신 다음 백기를 들고 돌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현실은 인간의 정치적 판단이 진리를 왜곡시킬 때 캄캄한 역사의 밤이 다가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진리의 왜곡으로 발생한 전쟁에 우리 군대를 파견해야 하느냐에 대한 새로운 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어두운 밤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본이나 중국 등 주변의 나라들은 국가발전에 총력을 집중하고 있는 마당에 우리는 국가발전에 대한 관심도 없고 경제문제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는데도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현 정권의 정치철학을 제공하는 소위 좌파 지식인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미 무덤에 묻힌 사회주의 노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대통령 탄핵이란 불행한 사건이 돌출하였고 총선까지 겹쳐서 이 나라 국민들은 둘로 갈라져서 갈등하고 서로 원수시하는 암담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생활 속에는 서로 토론하고 협력하고 화해하는 일은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권력의 쟁취를 위해 모든 사악한 방법을 동원하는 정신적, 도덕적 황폐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는 지금 온 나라에 번져서 나라 전체가 기름 가마처럼 꿇고 있습니다. 국민과 국민이, 가족과 가족이, 이념과 이념이, 세대와 세대가, 계층과 계층이 서로 갈리고 부딪치고 싸우는 만인 대 만인의 전쟁을 치루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께서 말세에는 가족이 원수가 된다고 하신 말씀이 지금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표면적으로 볼 때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이버 공간과 우리의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매우 치열하고 포학하고 심지어 잔인해서 감히 21세기 문화인이나 신앙인의 언동이란 말을 붙일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격의 만남과 대화, 이해와 용서, 인내와 협력, 기쁨과 평화란 것이 발붙일 틈이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전쟁입니까? 우리는 새로운 아침을 목 놓아 기다리면서도 불안과 공포, 실망과 절망만을 안겨주는 깊은 밤을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비극적인 역사의 밤이 계속되고 아침이 올 꿈도 꾸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삶의 진리와 우리 인간이 따르는 삶의 진리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시중에 상영 중인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나오는 한 장면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할 때 유대인이 고발한 것처럼 당신이 왕이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자기는 진리를 위해 세상에 온 왕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오?”라는 질문만 던지고 대답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아내와 대화하면서 예수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어봅니다. 그 진리를 안다고 대답하는 아내에게 빌라도는 자기 자신이 아는 진리를 설명합니다. 그 진리란 지금 죄 없는 예수를 놓아주면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과 반란이 일어나면 자기는 총독의 자리에서 즉시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황제 씨자로부터 이미 두 차례나 경고를 받은 바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몸소 지신 자기희생적인 십자가의 진리와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진리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엄청난 괴리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리인 새로운 계명은 자기희생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한 생명이 살기 위해 내 생명이 스스로 땅 속에 묻히고 썩어야 한다는 원초적인 진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진리로 삼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시키는 비도덕적인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생각과 신념의 변화 없이 가정도, 사회도, 나라도, 세계도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주님이 말씀하시고 몸소 보여주신 자기희생적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진리인 동시에 우리 인간의 존재와 삶에 없어서는 아니 될 진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개인이거나 가정이거나 사회이거나 간에 어떤 생명이나 유기체가 생존하고 진화하려면 사랑의 관심과 돌봄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알고 모르는 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희생하는 십자가의 사랑 없이는 어떤 인간이나 사회가 이 세상에 나타나고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우리가 현실적인 차원에서 풀이해 본다면 농부는 적은 수익을 감내하면서도 무공해 농산물을 생산하므로 생명과 땅을 살리고 보존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하고 노동자는 임금이 비록 만족하지 않아도 좋은 물품을 만들어 사람들이 즐겁게 사용하는데서 보람을 느껴야 하고 기업가는 회사에 속한 사람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여건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고심하면서 행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근검절약하여 서로 돕고 상대를 존중하며 불편한 것을 감수하면서도 환경보호에 앞장서고 자기를 과시하려는 욕망보다는 겸손한 자세를 지니고 사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 말씀에서 거리가 먼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건, 모르건 간에 이 생명의 진리를 깊이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주님의 새 계명을 거슬리고 그의 마음에 상처를 안기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솔직히 고백하고 참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인 우리만이라도 그의 말씀을 따라 자기를 비우고 겸손해지고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도 변할 뿐만 아니라 가정과 세상이 모두 변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캄캄한 밤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슬픈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어두운 죄악의 밤이 속히 지나가고 새롭고 희망찬 아침이 오기를 진심으로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침은 지구의 자전의 법칙에 따라 오는 자연현상처럼 자동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주님의 새 계명을 심각하게 받아드리고 자기희생적 사랑의 빛을 비칠 때만 어두움은 물러가고 희망의 새 아침은 밝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4. 주님은 그가 우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다음 마지막으로 더욱 심각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서로 사랑하면 주님의 제자로 인정받을 것이고 이와 반대로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매우 단정적이고 엄격한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어쩌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해 주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신 것과 같이 우리도 주님을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사랑을 실천하지 아니하고는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니 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생명의 원리이고 역사의 진리인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버릴 정도로 이웃과 사회와 민족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과 가족과 같은 이념과 계층에 속한 사람만을 감싸고 돌본다면 그것은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여 온 인류와 자연이 서로 어울려 살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간 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은 주님의 제자직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주님을 배반한 유대 지도자들이나 빌라도와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차별성 곧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자격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겉으로는 주님을 따르지만 속으로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위선자요 거짓말쟁이란 낙인이 찍히고 맛 잃은 소금처럼 길가에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독일 나치에 희생된 본회퍼 목사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은총은 값싼 것이 아니라 값 비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아무런 대가 없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받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고난이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고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데 신앙의 초점을 맞추고 그 사랑을 기다리는 이웃과 능동적으로 나누지 않을 때 우리는 주님의 은총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의 등불이 꺼짐으로써 밝아 와야 할 새벽은 계속 어둠 속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금요일의 어두운 밤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밤은 주님의 사랑을 계승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기희생적인 사랑에 동참할 때만 물러갈 것입니다. 세상을 어둡게 하는 죄악을 세상의 어떤 권세나 무력이나 법으로 근절할 수가 없습니다. 세속적인 힘으로 죄악을 물리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되고 가증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이 죄악의 어둠을 잠시 밝히는 촛불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영원히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을 계승한 우리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고 자기 생명을 버릴 때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다가왔던 죽음의 밤은 그의 부활과 함께 밝은 아침을 마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한 죄를 참회하고 서로 사랑하므로 부활의 소망을 기다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2004. 4. 9. (성금요일)
이사야 53:7-9, 요한 13:34-35

이계준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