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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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로 가라

마태복음 28: 1-10
2004. 6. 20(손원영목사)
1.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서로의 차이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요, 또 하나는 서로의 유사점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지금까지 기독교와 불교와의 관계는 대부분 차이점을 중심으로만 생각되어져 왔던 것 같습니다. 예를들면, 기독교는 타력종교이고, 불교는 자력종교라는 구분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기독교는 우리 인간 안에 우리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인간 밖에서 인간을 초월하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그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이와 달리 불교는 소위 자력종교로서, 인간의 내면 속에 불성이 내재되어 있고, 참선과 같은 수도활동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게 되면 모든 인간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생각하기에 그 양자 사이에는 차이점도 많이 있지만, 실상은 서로 대화하는 과정에서 차이점 보다 더 많은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관계에서도 그러하듯이, 서로의 차이점만 부각시키면 자칫 싸움으로 치달을 수 있음으로, 이제는 오히려 그 유사성을 더 부각시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달라이 라마가 말했듯이, 기독교와 불교는 비록 서로 다른 종교이지만, 진선미와 같은 공통의 가치를 추구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공통점을 배경으로 서로를 배우고 또 남을 거울로 삼아 나 자신의 신앙성숙을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오늘 그것과 관련하여 우리의 신앙성숙의 문제를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
1981년경으로 기억됩니다. 신군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사회가 혼란하였고, 그 때 불교계 역시 매우 시끄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사분오열된 상황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지도자들이 해인사에 칩거해 있던 성철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시끄러운 불교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도록 성철스님께서 좀 나서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름 아닌 조계종 종정이 되어달라는 청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 성철스님은 당연히 처음에 사양을 했습니다. 일개 선승으로서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결국 하나의 조건을 대면서 승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지켜온 해인사 선방을 결코 떠나지 않고 총무원 회의에 일체 참석하지 않는 조건으로 승낙한 것입니다. 아주 멋진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취임사를 발표하였는데, 그것이 장안에 큰 화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취임사는 이렇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단 한마디로 된 취임사였던 것입니다. 이 취임사를 놓고 많은 사람들이 설왕설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존경받는 대선사께서 그같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적인 말을 한 것에 놀란 것이 첫째요, 또 그분처럼 고승이 그런 말을 하였다면 분명히 그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하는 것이 둘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몰라 그렇게 웅성거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래 이 말은 성철스님의 말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 중국에서 쓰여진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라는 책에 나온 한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금강경이란 아주 유명한 불교경전을 오가, 곧 다섯명의 선승이 주해 곧 해석을 한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이 책 안에 야부스님이 이런 말을 한 것이 나옵니다. “山是山, 水是水, 佛在甚摩處)(산시산 수시수 불재심마처) 번역하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도대체 부처님이 또 어디에 따로 계신단 말인가!” 바로 성철스님은 이 한귀절을 읊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시의 전체를 읊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시를 아는 사람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왜 그가 그 구절을 인용했는지 다 이해했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 기독교인들이 “여호와는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기만 하면, 그 나머지를 말하지 않아도 시편23편 전체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뭏튼 성철스님은 이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취임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왜 부처님을 불당에서만 찾으려 하는가? 삶의 현장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곧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가 절간에 가서 예불을 드리고 시주를 많이 한다고 불자다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환경 속에서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불자다운 삶이 아닌가!” 이렇게 야부스님의 말을 빌어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철스님이 말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이 말은 불교인의 성숙과정을 말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우리 기독교인도 똑같은 성숙과정을 밟아서 신앙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세단계로 이루어진 신앙성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첫단계는 감각적 인식의 단계입니다. 그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할 때,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은 자연적인 수준에서 자연현상을 자연현상으로 인식하고 감각적 인식에 따라 세상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산은 산으로 인식하고 물은 물로 인식하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이 단계에 속한 사람은 세상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부귀영화를 쫒아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1단계로부터 벗어나 참선을 하거나 불도를 닦으면서 부처님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의 의식이 제2단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단계입니다. 기존의 가치체계가 완전히 전도되는 단계입니다. 사실 불교에서는 만물을 바라볼 때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이해함으로써, 만물일체의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근본에 들어가면 모두 하나라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서 지독한 추함을 보고, 가장 부드러움 속에서 가장 강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땅을 보고, 땅에서 하늘을 봅니다. 왜냐하면 추함과 아름다움은 결코 둘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인식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2단계에서는 물은 결코 물이 아니요, 산은 또 산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물 속에 하늘이 있고, 산 속에 물이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깨달음을 일컬어 견성(見性)이라고 말합니다. 볼 견자, 바탕 성자, 곧 만물의 뿌리 곧 근본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2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대부분 법열(法悅)을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까닥없이 히죽이죽 웃게 되고, 밥먹다가도 웃음이 절로 나고, 기쁨과 즐거움을 주체할 수 없어 하늘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불교에서는 바로 제2단계의 신앙을 제일 위험한 시기라고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가장 큰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게 되지만, 그것이 자칫 독선으로 흐르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가장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진리와 무관할 때가 바로 이 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는 다른 사람과 최고로 많이 부딪히게 되고, 자신이 완성된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위험한 단계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2단계는 제3단계로 반드시 발전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시 물은 물이요 산은 산으로 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다시 첫 번째 단계로 환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시말해 감각적 의식의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이 단계는 오도(悟道)의 단계로서, 만물이 불성을 지닌 거룩한 동반자로 파악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1단계처럼 장작패고 물긷는 것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만나는 길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물은 단지 우리가 마시는 물이 아니라, 불법을 지닌 존재요, 산은 단지 나무나 숲이 있는 산이 아니라 거룩한 부처님의 진리를 보시하고 있는 거룩한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숲에서 지저기는 산의 새소리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게 되고, 산에서 나무를 패는 남정네의 도끼질이나 부엌에서 설걷이 하는 아녀자의 손놀림도 이제 거룩한 불법을 만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작은 삶의 현장에서 선행을 행하고 부처님의 자비를 따라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극락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성철스님의 취임사는 “왜 너희들은 법당 안에서만 부처님을 찾으려 하느냐? 삶의 현장 속에서 불자가 되지 아니하면 참 불자가 될 수 없다. 참된 불교신자는 법당에서 염불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부처님의 가르침 대로 사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3.
저는 이러한 불교의 인식과정이 그대로 기독교인의 신앙성숙 과정에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좇아 살다가, 인생의 의미를 찾아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적 인식수준으로부터 벗어나 소위 성령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경험하셨겠지만, 처음에 성령을 체험하게 되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밥을 먹지 않아도 좋고, 심지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나면 내가 갖고 있는 것도 아낌없이 타인에게 나눠줄 수 있을 것 같고, 순교하라면 순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몇시간씩 무릎꿇고 기도해도 다리가 아프지도 않고, 매일매일 교회생활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교회에 오라 말하지 않아도, 각종 예배는 물론이고 새벽이고 저녁이고 교회에 모여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혼자 웃고, 길을 가다가도 혼자 웃음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모두 신학교에 가려고 작정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2단계의 모습니다. 특히 이 단계는 사도행전1장 8절의 말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말씀에 부채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에 열성을 넘어 극성을 보일 뿐만 아니라, 땅 끝까지 나아가 증인되기 위해 선교사로 서원하기도 합니다. 바로 2단계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난 후 바로 제2단계 속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혹은 삶의 현장에서 종종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만큼 싸움도 많이 하고, 갈등도 많이 겪고, 도무지 신앙이 미지근한 사람들을 보면 답답해서 가만 놔주질 않고,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예는 해외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에게서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그 뜨거움 때문에, 그리고 복음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에 직업을 포기하고, 선교사로 해외에 나갔는데 정작 나가서 현지인과의 다양한 문화 차이 때문에 혹은 투박한 신앙의 모습 때문에 갈등을 겪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왜 제자들을 향해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찬찬히 따져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지하게 질문하는 중에 우리는 비로소 제2단계에서 제3단계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이야기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을 보러왔더니 예수는 없고, 대신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 그러면서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28: 5-7) 천사의 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테니까, 제자들도 빨리 그 곳으로 가라는 천사의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천사들의 말을 전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가는 그 여자들에게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직접 나타나서 같은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무서워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10절) 또 갈릴리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갈릴리로 가는 반복된 주님의 말씀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땅 끝으로 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먼저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을까? 갈릴리로 먼저 가라!!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땅 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갈릴 리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땅 끝보다 갈릴리가 먼저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여기서 갈릴리란 무슨 의미입니까? 갈릴리는 본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고향입니다. 그들은 바로 그곳에서 목수로 혹은 어부로 잔뼈가 굵은 것입니다. 갈릴리는 바로 그들의 잔뼈가 굵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으로 먼저 가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제자된 우리가 깊이 새겨야할 대목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다시 가라고 말씀하셨을까?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이 바로 성숙한 기독교인이 되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삶은 우리가 모르는 낯선 곳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되는 거룩한 삶은 거창한 땅 끝의 해외선교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기독교인으로 인정되는 것, 그것부터 기독교인의 성숙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고 낯선 세계로 흩어지기 전에 먼저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검증을 받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기뻐뛰며 직장을 버리고 신학교 가기에 앞서서, 먼저 자신의 삶의 터전, 갈릴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성숙해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예배당 안에서 결코 검증되지 않습니다. 살인자도 교회당에 안에 들어오면 그 분위기에 경건해 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사랑과 자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우리 스스로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우리의 가까운 이웃들에 의하여 검증되고 증명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검증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가정이요, 우리의 직장이요,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바로 우리의 삶의 현장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은 물이요 산이로다라는 성철스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믿기 전에 산은 산이요 물이라고 생각했던 그 자리를,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현존의 장소로 믿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김진홍목사의 자전적 소설 <황무지가 장미꽃같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가 19세에 철공소에 취직하여 노동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곳 철공소사장은 유명한 장로요 교회도 여러곳 개척한 소위 믿음이 좋은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그 철공소사장을 매우 미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회사는 다른 회사에 비해 10% 임금이 적을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에 비해 노동을 10%이상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노동자들로부터 원성을 사게 된 것은 매일 1시간씩 아침예배를 드리는데, 그 예배시간은 전체 노동시간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 노동자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내 가족이나 자식을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시키면 나는 개새끼다.” 이러한 기독교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먼저 갈릴리로 가야합니다. 기독교인은 먼저 직장의 동료로부터 기독교인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얼마전 들은 이야기인데, LA판 한국일보에 실린 기사라고 합니다. 정숙희라는 분이 기고한 글인데, 기독교인의 부끄러운 모습을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LA지역의 식당가에 돌아다니는 불문율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종업원을 구할 때, 절대로 기독교인은 채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특히 면접하러 왔을 때, 기도하는 사람은 절대로 채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경험상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실하지도 못하고 꼭 문제를 일으키고 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인의 성숙은 성령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난 감격으로 멈추어 서서는 안됩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은 자신이 두발 딛고 서 있는 그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도 공생애의 시작을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자란 삶의 현장으로부터 그의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병자를 고치고 사람들에게 참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성령을 받고난 뒤 처음에는 감격에 차서 곧장 예루살렘에 가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뻔 하였습니다. 다행히 겨우 몰래 광주리에 실려 창문으로 도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라비아광야로 가서 3년동안 영성훈련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그를 다시 설득해서 그의 고향인 다소로 가도록 권고했던 것입니다. 그의 활동연도를 추척하면 그가 그의 고향 다소에서 얼마나 머물었는지 아십니까? 자그만치 13년을 머물렀습니다. 그는 성령을 경험하고 나서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의 고향 다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그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의 가르침으로 살고 또 그들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정말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욕하고 돌을 던지며 핍박할지라도, 그것을 기꺼이 참으며 자신의 가슴에 그 모두를 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여러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속히 오라하신 그 갈릴리는 땅 끝으로 이어지는 출발선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다소는 온 유럽으로 이어지는 땅 끝의 출발선이었습니다. 출발선이 생략된 경주는 언제가 무효가 됩니다. 과연, 우리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갈릴리로 가라.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갈등하고 부딛쳤던 우리의 갈릴리,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가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그 삶의 현장, 가정과 직장, 그리고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가라. 그리고 그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각오로 우리가 각자 자신의 가정과 직장을 향할 때, 우리의 삶의 현장인 갈릴리는 우리가 비로소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거룩한 현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가 주님의 자녀라는 것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