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조회 수 2224 댓글 0
1. 근자에 우리 사회에 떠도는 유행어가운데 웰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어의 well과 being이란 두 낱말의 합성어로써 정확히 발음하지면 웨빙이 아니라 “웰비잉”이어야 할 것입니다. well이 부사로 쓰일 때는 만족하게, 훈륭히다는 뜻이 되고 형용사로 쓰일 때는 건강한, 튼튼한이란 말로 쓰이며 being은 있다,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웰비잉은 행복, 복지, 안녕 등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well이 명사로 쓰일 때는 우물, 원천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웰비잉은 물 곧 생명이 있다, 또는 근원이 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웰비잉이란 말이 갑자기 유행하는 것입니까? 말 뿐만 아니라 실제로 웰비잉을 갖다 준다는 상품들 즉 웰비잉 주택, 식품, 화장품, 약, 운동 등이 날마다 매스컴을 통해 수 없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웰비잉 광고에 현혹되어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행복을 향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웰비잉을 찾아가는 것은 지금 우리가 행복을 느끼지 못하거나 불행하다는 말도 됩니다. 행복하지 않으니까 물질적이건 또는 심리적이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어떤 대상을 만나고 소유하려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웰비잉을 잡으려고 하여도 그 과정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하여 힘겨운 노동과 치열한 경쟁과 불확실한 결혼과 심지어는 무자비한 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그것이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건강해도 가족이 병들면 우리도 아품을 느낍니다. 우리는 제아무리 삶의 모든 면에서 웰비잉을 만긱한다고 할지라도 사회에 불행을 느끼는 사람이 많으면 공동체의식과 사회질서가 파괴되어 우리의 개인적인 행복이 위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소수 사람의 행복지수는 올라가는지 몰라도 대다수 사람의 행복지수는 떨어지고 있다는 통계를 보고 있습니다. 경제적 불경기, 실직자의 급증, 시대착오적 이념의 갈등, 50%의 국민만 만족시키는 독선적 정치, 국제사회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고립주의 등은 생각있는 사람들에게 염려와 불안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우리에게 불안과 불행을 가져오는 것은 정부의 무모한 정책이 아닌가 합니다. 선거공약이었던 행정수도 이전문제를 60%이상의 국민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적 비용이나 통일 후의 수도나 나라의 균형적 발전문제에 대한 아무런 청사진도 없이 강행하겠다고 정부와 여당은 외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였고 알카에다가 한국군 파병 중단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파병 강행”을 즉각 발표함으로써 김 씨의 죽음을 앞당긴 것입니다. 이 사건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가 국민을 불행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웰비잉을 쟁취하느냐가 아닙니다. 오히려 웰비잉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웰비잉이란 것은 어떤 규격화된 보편적인 표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그 척도와 질이 다를 것입니다. 개인의 생활이 안전권에 들어가고 사회의 안전망이 평균적으로 잘 구축되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유럽 선진국에서 자살율이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요즘 우리 사회의 저명인사들이 목 매어 죽고 한강에 투신하겠습니까?
웰비잉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회심리학자인 E. 프롬의 분류법인데 하나는 소유지향적 웰비잉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가 요구하는 모든 것, 즉 의식주와 사회활동과 심리적 만족 등 모든 것을 소유함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존재지향적 웰비잉입니다. 우리가 삶의 질을 존중하고 높이는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인데 그것은 생각하고 독서하고 대화하고 친교하며 개인적 성실성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두 웰비잉 가운데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습니까? 욕심 많은 사람은 두 가지 모두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만족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이고 윤리적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개인의 차원을 떠나서 우리 사회가 소유지향적 웰비잉을 추구하는 풍조에 휩싸여 있다는 의견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가진 자는 나눔으로 행복해지려는 생각보다는 더 많이 가짐으로 행복해지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반면에 없는 자는 노동의 연장과 생산성 제고로 행복을 얻으려고 하지 아니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투쟁하am로 행복을 추구합니다. 결국 소유지향적인 웰비잉의 풍조는 있는 자에게나 없는 자에게나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도 행복이 없고 모든 것을 다 얻고도 행복이 없으며 나아가서 사회 전체를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2주 전 일본 북해도 여행을 5일 간 다녀왔습니다. 실버 웰비잉을 즐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몇 일간 보고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일본인들의 삶을 새롭게 이해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웰비잉이 우리의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이미 GNP가 2만불을 넘어서고 선진국에 진입한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GNP 1만불인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개인적 행태나 사회적 분위기는 우리의 것과는 판이하였습니다.
일본은 지금 소유지향적인 웰비잉의 차원을 넘어 존재지향적인 차원에 도달한 듯 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소박하고 정직하고 근면하고 성실하며 친절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회는 어디에 가나 깨끗하고 질서정연하고 서로 양보하며 안정되 보였습니다. 일본은 그간의 경제적 불황에서 빠져나온다고 합니다만 물질적인 안정과 함께 정신적 행복을 모두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회의 어떤 구석을 보아도 우리들처럼 흥분하거나 들뜨거나 사치하거나 과장하거나 소란한 면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정치인들은 개인적인 욕망과 정당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국민을 악용하고 나라의 위기를 자초하는 반면에 일본의 정치인들은 여야가 모두 국민과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그렇치 않으면 정치적 생명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질투하는 일본이 우리보다 앞서 선진국으로, 존재지향적으로 발전하는 배경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원인가운데 특별히 그 사회에 뿌리내린 선(禪)불교가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일본의 기독교는 인구의 1%에 불과하고 지배적인 종교는 선불교입니다. 좌선(座禪)을 통해 참 자아를 발견한다는 이 종교가 그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인구 중 30%가 불교인이고 25%가 기독교인이며 더욱이 유교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00%임에도 불구하고 소유지향적 행복추구를 탈피하지 못하는 것은 어딘가 문제가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2.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소유지향적 웰비잉에 사로잡힌 풍토에서 벗어나서 존재지향적 웰비잉을 향유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행복해 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인간인지라 가정을 가지고 세상에 살면서 불교의 tm님이나 가톨릭의 수도사들처럼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책임을 일체 부정하고 의식주의 문제를 잊어버리고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속주의나 물질주의 속에 빠저서 저속한 욕망만을 충족시키면서 동물처럼 살아서도 아니되고 그렇게 해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행복의 근거를 다시 한 번 깊이 명상하면서 참 웰비잉을 찾았으면 합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5:3에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사용하던 공동번역에는 “복”이란 말 대신에 “행복”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조금 풀어본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늘 나라의 소유자가 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행복의 조건은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이고 하늘 나라를 소유할 때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마음이 비어있는 것, 마음의 욕심을 모두 버린 것, 이기적인 자기의 부정을 말합니다. 법정 스님은 마음을 비우는 것, 가난해지는 것은 과욕을 버리고 하나로 만족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는 물질적인 소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지식, 능력, 신앙 모두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자기의 목숨까지 희생하면서도 “다 이루었다”는 인생의 완성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들이 먼저 해야 할 것은 마음이 가난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은 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리고 좀 더 행복한 삶을 위하여 끊임 없이 노력하고 경쟁하고 싸우는 욕망의 투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집 없는 사람이 월세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자택으로, 자택에서 저택으로 옮기려는 것과 같이 욕망의 눈 덩어리는 계속 커져만 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마음을 비우라, 욕심을 버리라는 것은 인생을 포기하고 죽으라는 말과 다름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심이란 순기능을 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그것 없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발전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위한 끝 없는 욕망의 추구가 행복보다는 오히려 불행을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과 같이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1:15) 낳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의 종말은 죽음과 파멸에 이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와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또한 그렇게 살아가신 행복에 도달하기 원한다면 어떤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마음이 가난해지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가난 곧 온갖 욕망을 신앙의 결단으로 제거하는 것, 그리고 바울의 말과 같이 스스로 만족하기를 터득하는 것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서 행복을 누리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입장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값을 제대로 치러야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값을 치르지 않고 무료승차로 하느님을 찾고 교회에 다니므로 사이비 행복에 빠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3. 그러면 마음이 가난한 자가 입장권을 가지고 들어가는 하늘 나라가 도대체 뭐길래 우리에게 행복을 준다는 것입니까? 하늘 나라는 고통도, 아픔도, 죽음도 없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도 없으며 노동하고 경쟁하고 싸우는 일이 없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까? 만일 하늘 나라가 그런 것이라면 무미건조해서 살맛이 없을 것이고 가고 싶은 매력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늘 나라라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이 임재하시고 그가 통치하시므로 모든 인간과 존재들이 영원한 기쁨과 평화 속에서 삶의 축제를 벌이는 곳입니다. 이것은 죽음 후에 오는 세계나 흔히 말하는 천당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지금, 여기에 이미 있는 것이고 또한 우리가 건설해 나가야 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진리와 자유, 사랑과 정의, 아름다움과 평화가 넘치는 우리의 마음, 가정, 사회, 세계 그리고 현재와 미래, 이 생과 저 생 모두를 포함하는 우주적 공동체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것에 값진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는 자기자신의 생명 곧 루아흐를 불어 넣으시므로 그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임재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고전 3:16)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임재를 증거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우리와 모든 존재 안에 생명의 원천으로, 존재의 근거로 임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웰비잉이 우리가 찾는 피상적 행복이 아니라 행복의 원천인 생명의 근원 그리고 존재의 근거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우리 욕망의 그림자가 너무나 크고 캄캄해서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성전과 그의 모습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를 비우고 그를 만나게 되면 예수의 말씀처럼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한 10:30)임을 알게 되고 그와 함께 있으므로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지며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할지라도 하느님 안에서 만족할 수 있고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존재의 뿌리인 고향으로 돌아가는 행복감과 같은 것이고 맛의 근원인 향토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1:1-3에 하느님 나라에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이 인간의 욕망 중심에서 하느님의 말씀 중심으로 그 축을 옮길 때 행복해진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분수에 넘치는 욕망과 교만을 포기하고 우리 안에 참 생명으로, 존재의 근거로 임재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따라 날마다의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삶은 푸르고 왕성하게 자라게 되고 생명의 열매가 수 없이 매달리는 행복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의 삶이 행복한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함께 이웃과 모든 만물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임재를 깨닫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우리의 행복만을 위하여 우리의 이웃과 자연을 이용하고 파괴해하는 대상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피조물을 파괴하고 동료 인간을 남용하고 원수시할 뿐만 아니라 창조주의 솜씨를 훼손하고 하느님 자신을 부정하는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모든 인간과 만물에 하느님의 임재를 깨닫게 되므로 우리는 그들과 같은 피조물로, 형제자매로 화해하고 사랑하고 평화를 누리며 하늘 나라 잔치를 즐기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속주의적 웰비잉이라는 것에 휘말린 풍토 속에서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신하고 있습니까? 혹은 행복의 조건이 모두 갇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십니까? 아니면 모든 조건은 완벽한데 불행하십니까? 여러분이 만일 진정으로 행복하시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저들의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고 명상하고 실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불행하시다면 행복의 근원인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십시오. 그 때 우리는 히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참 행복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고 인생의 궁극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을 비우므로 하느님 나라와 그의 현존에서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 되시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행복한 사람들 2004. 6. 27.
시편 1:1-3, 마태 5:3
이계준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