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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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개혁되는 교회


본문 : 로마서 1장 16-17절, 3장 19-24절.


신반포교회 홍정호 전도사 (2011.11.13.)




여러분,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한 주였습니다. 이 맘 때면 가로수의 낙엽이 모두 떨어지고 긴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데, 우리는 긴 겨울을 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겨우살이를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 둘씩 버리고 비워내는 나무처럼, 바라기는 우리의 삶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10월의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주일이었습니다. 올해는 종교개혁 494주년이 되는 해로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6년 앞두고 있는 해이기도 합니다. 젊은 사제이자 신학교의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부패한 가톨릭교회와 당시 절대 권력을 누리고 있던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며 시작된 종교개혁의 정신은 오늘 우리 개신교신앙의 토대와 근간을 이루며 매 주일의 예배와 삶의 실천 속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으신 로마서의 본문은 "우리는 아무 공로 없지만 우리의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인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칭의(稱義, justification)의 교의의 핵심적인 내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건조한 교리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 교회나 교황의 권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통찰하는 종교개혁의 근원적 정신과 잇닿아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이를 "오직 믿음(sola fidei), 오직 성서(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cia)"라는 개혁적 기치 속에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근본정신과 교회의 방향성에 대하여는 작년 이맘 때 손목사님께서 설교하신 내용(제목: 지속가능한 교회)이 있는데,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일독을 권유 드립니다. 제가 오늘 함께 나누려는 말씀은 손목사님께서 작년 이맘 때 하신 설교에 이은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임을 밝히며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항이 사라진 저항자들


개신교인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곧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은 종교개혁에 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시각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신교에게 '종교개혁'은 가톨릭에게는 '교회분열'의 사건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거룩하고 보편적인 하나의 사도적 교회를 지향하는 가톨릭교회가 교황과 교회의 권위에 저항하고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그 근본적인 토대를 뒤흔들며 탄생한 개신교가 달가울 리 없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기득권을 지닌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목소리가 달갑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은 어떠한 교리나 체제나 제도의 한계 안에 가둘 수 없는 것이며, 더욱이 특정한 집단이나 사람들에 의해 독점될 수 없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저항의 정신이 바로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자 목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것은 개신교 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개신교와 개신교인의 자기정체성과 관련한 문제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제 500주년을 향해 가고 있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오늘 개신교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개신교 자체가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오늘 우리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돌아보는 것과 깊은 관련을 맺습니다. 




'큰 목사님'과 '큰 스님'


오늘날 개신교인, 특히 개신교 목회자와 개신교 내의 평신도 지도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존경은 고사하고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선호도 조사에서 개신교의 꼴찌를 예상하는 일은 이제 내기거리도 안 되는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개신교 목사가 되기를 바라는 저로서는 참담할 따름입니다. 여러 원인이 있겠습니다만, 무엇보다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개신교 목회자, 혹은 저와 같은 목회자 지망생(전도사)들의 책임이 피할 수 없이 크다고 생각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강단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평신도 지도자들의 책임 또한 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포도원을 가꾸는 청지기의 직분을 맡고서도 포도원을 망치는 여우가 되지는 않았는지, 오늘 우리 개신교의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은 함께 그 책임을 통감하여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 '크기'에 대한 집착, 남들보다 높아지고 커지는 것을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 왔던 우리의 잘못을 회개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소위 '큰 목사님'과 '큰 스님'을 모시는 기준은 사뭇 다릅니다. 목회자의 성공과 실패는 그의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지향과 실천으로부터 평가되지 않고, 오직 하나의 기준, 곧 교회와 회중의 '크기'로 평가되기 일쑤입니다. 내면의 크기가 큰 목사가 '큰 목사님'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교회의 크기를 키워놓으면 '큰 목사님'으로 불리는 종교, 그것은 이미 종교이기를 포기한 종교상인의 집단이라고 밖에 달리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목사직을 성직이 아닌 여러 직업 가운데 하나로 보는 세속의 시각을 두고, 남을 탓 할 이유가 없겠습니다.


반면 불교의 경우 큰 절의 스님이 ‘큰 스님’이 아니라, 정신의 크기가 큰 스님이 ‘큰 스님’으로 불립니다. 성철 큰 스님이 ‘큰 스님’인 이유는 그분이 큰 절의 주지라서가 아니라, 그 정신의 크기에 있어 큰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신교 목회자의 경우에는 너나할 것 없이 외형적인 '크기'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입니다. 목회자들이 모여도 온통 '크기'에 관한 얘기뿐입니다. "너희 교회 몇 명 모이냐, 올해 몇 명이 새로 등록 했냐, 어떻게 전도(광고) 할 것이냐"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그런 관심에 동참하지 않거나 다소 비판적인 거리라도 취할라 치면 “교만하다, 복음적이지 않다”는 비난을 받으며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처럼 정신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에 들어서기보다 외형적인 ‘크기’를 키워 남들에게 인정받고, 스스로 자기만족을 누리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저 또한 저를 사랑하고 아껴주시는 분들로부터 '주의 큰 종'이 되어 훗날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이끄는 좋은 목회자가 되시라는 격려를 종종 받곤 합니다만, 저는 그 기도와 격려의 말씀을 늘 '정신의 크기가 큰 목사'가 되라는 격려로 받고 있습니다.


건강한 아이가 키와 몸무게가 성장하듯, 건강한 교회가 적절하게 성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장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아이의 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조치를 취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크기에만 집착하여 아이가 100 킬로, 200 킬로, 500 킬로그램이 되고, 심지어 메가톤급 아이로 성장해도 마냥 좋다고 박수치는 것은 크기에 대한 집착이 빚어내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계준 목사님께서는 그런 교회의 목회자를 일컬어 "목회가 아니라, 목축을 하고 있다"고 일갈하신 바 있습니다. 성장은 크기에 집착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말씀의 근본정신을 꼭 붙들고 그것을 잃지 않고 살아내려는 굳은 의지와 진실한 믿음의 실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건강이 우선이지 성장이 우선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교회성장을 위해 '꼼수'를 부려서는 머지않아 바닥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빈곤한 정신,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얕은 영혼으로는 깊은 바다와 같은 성숙과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크기에 집착해 지리멸렬을 면치 못하는 개신교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직자다.


개신교의 평신도 지도자들 또한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을 배반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종교개혁의 신학이 성취한 또 하나의 위대한 업적은 주님의 일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헌신함에 있어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따로 없이 '모두가 성직자'라는 소명을 발견했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실현함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가 부름 받은 사제요, 구별된 성직자라는 것입니다. 사실, 종교개혁의 뜻을 개신교가 잘 살려왔다면 오늘날 개신교에는 교인이 이렇게 많이 몰리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모두가 성직자라니,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책임이 소수의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믿는 사람 모두가 그렇게 해야 한다니, 누가 교회에 오고 싶을까요.


한국의 개신교는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을 딱 정반대로 뒤집었습니다. '모두가 성직자'가 아니라 '모두가 평신도'가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계급철폐에는 성공했으나, 방향성이 역전되었습니다. 마치 반상(班常)의 구별을 없애고 모든 인간이 동등한 존엄성을 누리는 성서적 이상을 실현시켰지만, 너도 나도 양반이라고 하니 아무도 양반이 아닌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성속(聖俗)의 경계를 허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모든 것이 세속적이 되어 당혹스러워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반상의 차별을 철폐하고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고, 성속의 경계를 허물어 우리의 일상이 예배의 자리가 되게 하는 것은 분명 성서의 이상이고, 예수님께서도 몸소 실현하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르는 신앙은 분명 그 이전에 비하여 진일보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개신교가 '모두가 사제'요, '모든 때와 모든 장소가 거룩하다'는 근본정신을 떠나 '모두가 평신도'로, '모든 시간을 세속적으로' 살게 되면서 오히려 세상은 반상(班常)과 성속(聖俗)의 구분이 뚜렷한 이전의 종교들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가톨릭은 그 신학과 제도의 전근대적 폐쇄성과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구별되어 세워진 성직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제들의 확고한 자기정체성 덕분에 오히려 오늘 신뢰받는 종교가 된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이에 비해 생각이 트인 개신교는 진보적이고 세련된 신학과 유연하고 민주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점 때문에 교회로서의 본질을 잃고 그 구성원들로부터도 종종 일개 비영리단체나 친목단체로 오해되곤 한다. 이것은 개신교가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을 뒤집어 오해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교회는 중소기업이 아니고, 목회자는 CEO나 직원이 아니며, 모든 성도는 성직자입니다. 목사는 교회와 신도를 섬기기 위해 부름 받은 사제요, 평신도는 세속의 사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삶의 모든 때와 장소가 목회지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 직장과 학교의 동료들, 오고 가며 마주 치는 모든 이들이 우리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며, 평신도에게 맡겨진 양떼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에 입각한 개신교 정신의 요체요, 우리가 흠모해 마지않는 신반포교회의 창립정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즐거움’과 ‘행복’으로 대체된 종교성


세속적인 가치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향한 윤리적 실천을 제거한 채 일신의 '즐거움'과 '행복'이라는 지극히 현세적인 이상으로 '종교성'을 대체한 것, 여기에 개신교의 위기의 근본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긍정의 힘'이 '십자가의 복음'을 대체하고, 성공과 번영의 '주술'이 자기 비움과 낮춤의 '기도'를 대체하고 있는 오늘의 개신교, 권력과 자본의 중심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힘의 종교'로서의 개신교는 정말이지 종교성의 근본에 대한 심각한 자기반성과 뼈를 깎는 성찰 없이는 미래가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며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질 것"(막13:2)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일갈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교단별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크고 더 웅장한 교회당을 짓겠다고 나서는 어리석은 개신교와 개신교의 지도자들을 향한 꾸지람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무게 중심을 잃은 배가 표류하거나 침몰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선장의 웅변술과 항해술이 뛰어나 일시에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배에 태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배는 아무리 사람이 많이 타도 언젠가는 침몰하기 마련입니다. 교회에 있어서는 '크기'나 '효율성'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근본문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질서에 따라 살지 못하고, 세속의 질서를 모방하고 세속을 닮고 싶어 몸살이 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가 거룩한 주님의 몸이기를 포기하고, 목사가 교회를 위해 부름 받은 성직자이기를 그만 포기하며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크기가 작은 교회라고 안전지대는 아닙니다. 지금은 작지만 언젠가는 큰 교회가 될 것을 바라며 이미 성공한 대형교회의 지향을 모방하는 데 혈안이 된 작은 교회라면 이미 대형교회의 미니어처에 다름 아니며, 크기의 미망에 사로잡혀 본질을 잃고 표류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의 교회다움, 성도의 성도다움은 외형적인 크기가 아니라 그 정신의 크기에 달려있기에 작지만 영향력 있는 교회, 작지만 정신에 있어 큰 교회가 개신교의 다수를 이루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지 않으면, 힘주어 말씀드리지만, 개신교의 미래는 없습니다.




세상의 사제들을 섬기는 목회자


그렇다면 목사는, 주님의 일을 위해 부르심을 입은 우리 모두 가운데 특히 교회를 섬길 책임을 안고 있는 목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수련목회자 과정에 있는 전도사로서 제 나름대로 앞으로 이런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에서 외람된 줄 알지만 몇 가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암담한 개신교의 오늘에도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을 잃지 않고 목회하시는 선배 목사들이 계시고, 그 뜻을 잃지 않고 이어가는 것이 나중된 자로서의 저의 책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신교 정신의 타락과 쇄신에 있어 목회자의 책임과 역할이 누구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목회자는 자기 스스로 주님의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성직자임을 긍정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들이 세상을 위한 성직자로 부름 받은 동등한 사제임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특권을 누리고 대접받는 자리에서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따라 세상의 멸시와 천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사람이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 갈 갈을 묵묵히 갈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교회와 더불어 함께 걷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의 일에 헌신함에 있어서는 목회자나 평신도 너나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이며,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제들임을 긍정하고 독려하는 사람,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깃든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그 음성에 따라 살도록 돕는 이가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권위가 그분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듯, 목회자에게 권위가 있다면 이는 학력이나 약력 등의 외적인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의 크기로부터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안에 마르지 않는 샘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밖으로부터 은혜의 단비가 내리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 깊은 샘물을 파고 그 샘에서 나오는 맑은 물을 마시며 무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는 이가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목사는 학식이 있되 벼슬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선비'가 되어야 하고, 고매한 뜻을 세우되 시련이 와도 굽히지 않는 '지사'(志士)가 되어야 하며, 그러면서도 한 사람을 향한 끈질긴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잃지 않는 인정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목사는 무엇보다 거룩한 진리의 제단 위에 자신을 바친 사람이어야 하며,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을 기꺼이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위해 죽기를 각오한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목사는 칭찬과 높임을 받는 자리에 혹 오른다면 두려워하며 속히 도망칠 준비를 해야 하고, 하늘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왕으로 삼고자했던 무리를 피해 멀리 산으로 피하셨던 것처럼(요6:15) 고요함이 그의 내면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참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도대체 이상만 높아서 누가 목사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밤 하늘에 높이 뜬 별은 우리가 그 별을 따서 곁에 둘 수 없을 만큼 높이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의 어두운 밤길을 비추는 것처럼, 이상은 현실이 되지 못한다고 버려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현실에 당장 적용 가능한 처세술과 정치적 모략이 하느님의 꿈을 비웃는 세상, 권력과 야합한 종교가 예언자의 외침을 짓밟는 세상에 주님께서는 낮은 자로 오셔서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개신교의 목사는 바로 이러한 종교개혁의 근본적인 정신, 하느님의 권위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으려는 '오직 믿음, 오직 성서, 오직 은혜'의 저항적 급진성을 늘 마음 속에 지니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즐겨 부르는 찬송가운데 323장이 있습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다" 하는 찬송은 교회를 섬기는 목사로 부름을 받은 사람만 불러야 할 찬송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삶의 모든 때와 장소에 우리가 목회자로 부름 받았음을 고백하며 불러야 할 찬송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목회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우리 자신을 하느님 앞에 내어드리고 사는 삶이 곧 성도의 삶이며, 특히 개신교도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몇 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교회는 개혁되어야 하되,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nda et semper reformanda)."는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을 시급히 되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하느님의 동등한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성직자들임을 잊지 않으며, 우리의 모든 때와 장소를 하느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삶의 자리로 바꾸며 살아가는 일에 우리 자신을 아낌없이 드리는 저와 모든 교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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