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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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7:44~51
요 11:38~44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이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각 사람마다 적절한 달란트를 주셔서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과 이웃과 교회에 봉사하게 하십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하느님은 저에게도 몇몇 달란트를 주셨는데 어떤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인 반면, 어떤 것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잘 드러낼 수 없는 재능이었습니다. 겉으로 잘 드러나는 것 중에 찬양집회를 인도하는 재능이 있었는데, 저는 눈에 띄는 이 재능 때문에 쉽게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고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는 사역지마다 사람들은 저의 재능에 대해 칭찬과 부러움을 표시했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사역의 방향을 아예 그 쪽으로 잡으라고 진지하게 조언까지 해 주었습니다. 한 동안 저는 그 칭찬들 덕분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교만이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저에게는 분명 찬양인도 말고도 몇몇 다른 재능들이 있었건만 사람들은 제게 도통 다른 일은 맡기려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교인 수련회 준비를 위한 회의를 한다고 합시다. 찬양곡 선정과 찬양팀 전반에 대한 책임은 제일 우선적으로 저에게 맡겨집니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밖의 일, 예컨대, 성경공부 공과를 만든다거나 특별프로그램을 기획한다거나 글을 쓴다거나 설교를 한다거나 하는 일들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몫입니다. 심지어 제가 사역했던 어느 교회에서는 저를 아예 ‘찬양전도사’라는 근원을 알 수 없는 호칭으로 묶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런 호칭과 시각이 저를 얼마나 옭아매는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제 안에 있는 다른 달란트들을 꺼내어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고정된 시각은 제 사역의 범위를 크게 축소시켜 저를 자유롭지 못하게 했습니다. 지금도 옛날에 사역했던 교회 사람들과 연락이 닿을 때마다 그들이 인사치레로 던지는 ‘전도사님의 찬양 소리가 그리워요’라는 말이 그저 그런 감흥으로 다가 오는 반면, 어느 청년이 ‘전도사님의 글과 설교가 정말 그리워요’라는 말을 했을 때는 정말이지 고맙고 기뻐서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여러분, 이 답답한 속박감을 짐작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거기서 벗어났을 때의 놀라운 자유함을 겪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조금 더 그 대상을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그 대상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정관념 속에 저를 가두어 버렸을 때, 저의 활동반경이 실제로 제한되어 움츠러들었듯이 우리의 좁디좁은 의식 속에 어떤 대상을 가두어버렸을 때 그 대상은 우리에게 있어 극히 제한된 의미로 축소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며, 비약적으로 말하자면 그 대상을 모독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2.
사실 이와 비슷한 일들, 즉 자신의 의식과 관념의 틀에 신앙의 대상을 가두어 버리는 일들은 오늘날의 기독교회 내에서 거의 매일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가둠’의 문제를 두 가지 측면으로 살펴보고 이를 경계의 대상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느님을 가두는 일’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7장 44절 이하의 말씀은 스데반의 최후 변론 일부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스데반은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열렬한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신성모독죄로 고발당하여 끝내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일장 설교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열정적으로 토해낸 뒤 돌에 맞아 죽음으로써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가 되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그 최후 설교의 결론부에 해당합니다. 제가 이해하기 쉽게 요약해 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낼 때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하느님의 장막을 마련케 하셨는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왕국을 건설할 때까지 그 장막을 물려받았다가 솔로몬왕 때 이르러 장막 대신 성전을 짓고, 그것을 하느님의 거처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유대교는 성전중심의 종교가 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성전에 거처하신다고 생각했고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매년 절기 때마다 의무적으로 성전을 방문해야만 하는 규정까지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성전 중심의 신앙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48~50절에서 스데반은 외칩니다.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말하기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주
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 한 것과 같습니다.

스데반은 하느님을 일정한 장소에 가두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 분은 하늘과 땅에 충만히 편만하신 분인데 어떻게 그 분을 일정한 장소에 가두어 두겠느냐는 말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48절에 있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이라는 구절입니다. 제임스 던(J. Dunn)이라는 학자는 이 표현이 당시 헬레니즘계 유대인들이 우상숭배를 저주하는데 규칙적으로 사용하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비판할 때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라는 표현을 고정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스데반은 4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즐거워했다는 말을 하면서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것을 두고 즐거워하였습니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표현, 즉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이라는 표현을 성전에도 적용하였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시각으로 볼 때 성전은 하느님을 가두어 둔 일종의 우상이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투쟁과 그의 장렬한 죽음은 하느님의 복음과 정신을 인간의 틀 속에 가두고 질식시키려한 유대교와의 싸움이었다고도 볼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외침 속에 담긴 분명한 일성! 그것은 바로 ‘하느님은 가둘 수 없다! 하느님은 가둘 수 없다!’라는 반복된 절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무언가에 가두어 두려고 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교리’라는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가두어 두려고 했습니다. 교리란 원래 이단과의 싸움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안전선이었지만, 서서히 그것이 절대화되면서 사람들은 하느님을 그 교리 조항 속에 끼워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교리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철학, 논리학, 수사학, 언어 등으로 만들어진 것이니만큼, 태생적으로 유한한 것이며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으로는 결코 무한한 하느님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교리’를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또 ‘전통’이라는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가두어 두려고 했습니다. 교회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은 비신앙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배도 기도도 찬양도 해 오던 형식에서 벗어나면 큰 일 나는 줄 압니다. 전통적인 기도에 익숙한 한 장로님의 얘기를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교회에 한 집사님이 외국에 이민을 가게 되어 목사님과 장로님이 공항으로 배웅을 나갔습니다. 출국을 앞두고 게이트 앞에서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목사님은 그 집사님을 위해 장로님께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평소 지극히 전통적인 기도 형식에 철저하시던 그 장로님. “사랑과 자비와 정의가 풍성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매우 상투적이고 고답적인 표현으로 기도를 시작하시는데 이어지는 내용이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육일 째 되던 날에 아담과 하와를 빚으시고,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어....” 이거 심상치 않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죽 읊으신 뒤에야 이민가는 집사님 이야기를 꺼낼 태세입니다. 기도가 한참 진행되어 가인과 아벨, 노아의 홍수, 다윗과 골리앗, 신약으로 넘어와서 예수님과 사도 바울에 요한계시록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까지 다 끝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했는데 ‘아멘’ 소리가 한 명 목소리 밖에 나지 않습니다. 눈을 떠 보니 이민 가는 그 집사님 가정은 이미 보이지 않고 옆에 목사님만 홀로 있습니다. 기도가 워낙 길어지니까 기다리지 못하고 이미 출국장으로 들어가신 것이죠. 장로님이 놀라 묻습니다. “아...아니, 목사님. 다들 어디 가셨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아..네...다른 사람들은 아까 노아의 홍수 때 다 떠내려갔습니다.”
우리 하느님은 전통적인 어떤 형식에도 가두어지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나 예배할 때나 ‘반드시 이런 형식을 취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때때로 하느님의 자유로움을 속박합니다. 사실 기독교 전통도 매우 다양합니다. 우리가 자라면서 보고 경험한 기독교 전통은 이 세계에 수많은 나라 수많은 시대에 존재하는 기독교 전통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전통’도 뛰어넘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또 ‘성경’을 통하여 하느님을 가두어 두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무한한 하느님을 유한한 인간의 문화에 드러내주는 최상의 방편이지만, 성경 속에 하느님의 모든 것이 들어가 있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 하느님이 이 한 권의 책으로 다 설명할 수 있는 분이라면 그 분은 신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경’도 뛰어넘습니다.

‘교리’도 ‘전통’도 ‘성경’도 하느님을 드러내주는 필수불가결한 방편들입니다. 저는 이것들 안에 들어있는 유익함이나 거룩함이나 혹은 하느님의 신적인 계획과 영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을 모두 다 표현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하느님을 그 이름 안에도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4:26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무슨 말입니까? 적어도 창세기 4장 26절 이전에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어떠한 이름으로든지 부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일까요? 하느님은 이름을 붙여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이 결국 그 존재를 어떤 대상으로 규정한다고 할 때 하느님은 그 어떤 이름으로 규정 불가능한 궁극 그 자체이므로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의식 속에 하느님을 그릴 때마다 ‘하느님은 이보다 크시다’라고 스스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우리 머리 속에 그려진 하느님,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을 하느님의 전부라고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를 버릴 필요까지 있습니다. 위대한 스승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벗어나는 출구는 그 분께로 들어가는 입구다!” 우리가 우리의 고정된 하느님 의식으로부터 벗어날 때, 우리는 진정 더 크고 자유로운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자유롭게 풀어드립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두는 일’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께서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무덤 속에 뉘어졌고, 온 몸은 시체를 감싸는 천으로, 얼굴은 수건으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몸에서는 악취가 풍기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무덤의 문을 열라 명하시고 죽어 있던 나사로를 말씀으로 다시 살리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온 몸과 얼굴을 천으로 감은 나사로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를 풀어 주어 다니게 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사건이 예수께서 주시고자 하는 생명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드러내는 사건이며, 예수께서 주신 생명은 바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살아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생명이 아니라, 살아서 자유를 누리는, 자신을 묶거나 혹은 가두고 있던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그런 생명 말입니다. 자신만의 어두운 동굴에서 뛰쳐나와 다른 사람들의 호흡을 같이 나누어 보는 그런 열려진 생명 말입니다.
20세기의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의 책을 읽다가 매우 인상적인 구절을 하나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지옥이라고 하면, 무슨 감옥처럼 바깥쪽에서 강제로 걸어 잠그는 감금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C. S. 루이스는 오히려 지옥은 빛을 거부한 사람들이 안에서 걸어 잠근 세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비유를 좀 비약적으로 확대해 보자면, 이런 명제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들만의 세계에 스스로 갇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모든 사람들은 천국의 반대편에 있다”라고 말입니다.
흔히들 바리새파에 대한 예수님의 혹독한 비판을 단순히 그들의 율법주의적 신앙관에서만 찾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의 분리주의적인 성향 때문이라고 봅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페루쉼’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말은 곧 ‘분리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철저한 율법적 완전성을 자부한 나머지 자신들의 영적인 위치를 다른 일반인과 분리하여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보다 더 율법적으로 완전하고, 보다 더 영적으로 하느님과 가까이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자신들만이 진리를 수호하고 있다는 이 교만한 독선적 분리주의는 가장 지옥스러운 것이며, 예수님이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수탉이 물을 먹는 모습을 보고 한 인도주의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렇게 고개를 올렸다 숙였다 하니 얼마나 힘이 들까? 참 측은한 모습이로군.” 그러자 옆에 있던 현실주의자가 말합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니겠소? 목을 쳐들지 않으면 그나마 한 방울 물이라도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소?” 그러자 그 옆에 있던 기독교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두 분의 말씀이 맞기는 하지만 저 수탉은 한 모금 물을 마실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수탉이 물 한 모금 마시는 모습을 보고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사상과 종교 가치관에 따라 다른 관점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인도주의자와 현실주의자 그리고 기독교인이 보는 관점이 다르다고 해서 그들이 서로를 배타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유독 오늘날의 기독교는 자신의 관점을 사회 모든 영역과 심지어 다른 종교에까지 강요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는 좀 더 마음의 문을 열고 다른 생각, 다른 문화, 다른 종교와 대화해야 할 것입니다.
깊은 밤바다를 항해하던 어느 해군 전함이 멀리 희미한 불빛을 보았습니다. 부딪힐 것 같았는지 선장은 자기 배의 신호수에게 희미한 불빛을 향하여 "당신의 진로를 남쪽으로 10도 돌리시오"라고 메시지를 보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신속하게 저쪽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당신의 진로를 북쪽으로 10도 돌리십시오." 해군대령은 자신의 메시지가 무시되었다고 생각하고는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의 진로를 남쪽으로 10도 돌리시오. 나는 이 배의 지휘관 대령이란 말이오." 곧 저쪽에서 메시지가 왔습니다. "당신의 진로를 북쪽으로 10도 돌리십시오. 저는 3등 항해사입니다." 즉시 그 대령은 세 번째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두렵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진로를 남쪽으로 10도 돌리시오. 이 배는 무장한 전함이란 말이오." 상대편에서 곧 응답이 왔습니다. "당신의 진로를 북쪽으로 10도 돌리십시오. 여기는 등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상대방의 입장보다 자기 입장에 매몰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마치 등대더러 비키라고 외치는 이 해군 대령처럼 말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우리는 이러한 독선적 분리주의를 보수적인 교회 속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고가 닫혀 있고 율법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리주의의 위험은 보수주의, 자유주의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에게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일체 끊어버리고 우리만의 세계에 몰입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열린 신학을 지니고서 닫힌 공동체를 만드는 우를 범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위험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입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옮겨놓으라는 예수의 말에 사람들은 말합니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그렇습니다. 열려 있지 않은 모든 존재는 썩어서 악취가 납니다. 아무리 좋은 신앙과 신학을 가졌더라도 열려 있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악취를 맡을 수도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문을 열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말과 생각을 들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도 열심히 말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설사 그들이 문을 닫아버린다고 해서 우리까지 문을 닫을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고, 우리 예수님은 바로 ‘문 밖에 서서 두드리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랜 동안 ‘가둠’의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영원히 자유롭고 크신 하느님을 ‘우리 인간의 손으로 만든’ 갖가지 틀 속에 가두어 둘 수 있다고 믿어온 나날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그것들 속에 하느님을 가두고 그것에 절대 권력을 부여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의 지적처럼 우상을 만드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하느님은 창조 이후 지금까지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바람이 어디서 불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온 만물 가운데 스스로 충만하시며 지극히 자유로우십니다. 우리 머리 속에 있는 하느님을 지웁시다. 우리의 고정 관념이 붙잡고 있는 하느님을 지웁시다.
찬양 인도하는 모습이 저의 유일한 모습이 아니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만이 그 분의 유일한 모습은 아님을 끊임없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과 생각 속에 스스로 갇혀서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인정하지 못했던 날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스스로 분리되어 문을 안에서 닫아 걸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제 몸에 천을 칭칭 감고 냄새나는 동굴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근본주의든 보수주의든 자유주의든 급진주의든 그 어떤 주의라도 자신의 독보성을 주장하며 다른 입장을 무시할 때 그것은 이미 진리로서 그 생명을 내동댕이치는 행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유롭습니다. 그 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자유로워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열려 있습니다. 그 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열려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크십니다. 그 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커야 할 것입니다. 이제 그 자유롭고, 열려 있고, 크신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갇혀 있고, 닫혀 있고, 움츠러든 것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귓가에 강렬하게 맴돕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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